‘크락 데 셔바리엘’은 해발 750m의 야트막한 산 위에 우뚝 서 있다. 길이는 남북이 200m, 동서가 140m나 되며 면적만 해도 1만평에 이르는 큰 규모이다. 이 성채의 특징은 완벽한 이중구조라는 점이다. 튼튼한 외성이 있고 그 안에 외성보다 훨씬 높게 쌓아올린 내성이 성채를 둘러싸고 있다. 외성과 내성 사이는 도랑을 깊게 파고 물을 채워 해자를 만들었다. 내성은 성벽을 직각으로 쌓지 않고 그 밑부분을 45도 각도의 경사면으로 만들어 해자를 넘어온 적들이 성 밑까지 접근하는 것을 막았다.
‘크락 데 셔발리엘’은 이슬람권에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건 성채가 자리한 위치적 특성 때문인데, ‘크락 데 셔발리엘’은 홈스와 지중해를 잇는 전략적 요충지에 세워졌다는 점이다. 이슬람 사람들은 이 성채를 두고 ‘모슬렘 세계의 목에 박힌 가시’ 라고 까지 표현했다. 이 성채를 빼앗기 위하여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여러 차례 시도되었으나, 빈번히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 유명한 무적의 ‘살라딘’군대도 공격에 나섰다가 포기하고 물러났다는 일화도 있다.

그러나 십자군의 세력이 크게 떨어지고 자체적으로도 내분에 시달리던 무렵, 운명의 날이 다가왔다. 1271년 이집트의 술탄 베이발스 군대가 이 성채를 함락 시키려고 수 차례 공격을 시도했으나, 워낙 철옹성같은 요새라 함락이 쉽지 않았다. 간신히 외성을 점령하고 이어 시작된 내성 공격이 이렇다할 진전이 없을 때, 한 통의 편지가 십자군 총사령관 앞으로 전달되었다.
발신자는 공격의 주체인 이집트의 술탄 베이발스로, 편지의 내용은 성을 버리고 투항하면 성채에 주둔하고 있는 십자군을 안전하게 고향인 유럽으로 보내주겠다는 것이었다. 오랜 전투에 지칠대로 지친 십자군에게는 마치 단비와 같은 소식이었고, 또한 술탄 베이발스가 보낸 편지라는데 추호의 의심도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저항없이 항복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편지는 가짜였다. 성안으로 들어온 이슬람 군대는 농성 중이던 성안의 거의 모든 십자군을 죽이거나 포로로 만들었다. 약속 위반이라는 십자군의 주장에, 술탄 베이발스는 “나는 그 편지에 대해 전혀 아는 바 없다”는 한마디로 그들의 항의를 일축해 버린다. 치열한 전투 중에 심리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려주는 사례였다.

1271년 ‘크락 데 셔발리엘’ 성채가 함락되기 시작하면서 주변에 흩어져 있던 십자군 성채들은 이슬람 군대의 공격에 차례차례 무너져 버린다. 그만큼 십자군에게는 ‘크락 데 셔발리엘’이 중요한 요새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20년후인 1291년 현재 이스라엘 해변가에 있는 ‘아코’ 성채까지 함락됨으로써 십자군 운동은 그 종말을 보게 되었다.
비록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성안의 십자군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지만, ‘크락 데 셔발리엘’ 성채만은 잘 보존되어, 그 당시의 상황을 들려주고 있다. 특히 이 성채는 현존하는 중세 시대 건축물 가운데에서 건축미가 매우 뛰어나 건축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더할 나위없이 좋은 장소라고 한다.

얼마 전 취재차 시리아를 방문하여 간신히 찾은 ‘크락 데 셔발리엘’ 요새안에 들어서니 마치 타임 머신을 타고 중세 시대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성채 내에는 바닥이 꺼지면서 적을 밑으로 떨어지게 하는 장치, 몇 년 간은 족히 사용가능한 식량 저장소, 거대한 물 저장소, 방의 길이가 120m에 달하는 대집회소, 예배소, 식당, 숙소, 미로와 같은 비밀 통로들이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10세기 후반 유럽 기독교 국가들로 구성된 십자군은 수적으로 볼 때 그리 규모가 큰 군대는 아니었다. 예를 들면, 제1차 십자군 공격에서 예루살렘을 함락시켰을 때 십자군 수는 1만 5천명을 넘지 않았다. 그런데 작은 수의 십자군 군대가 절대 다수의 아랍인들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안전을 확보해 줄 장치, 즉 튼튼한 요새가 필요했다. 십자군은 난공불락의 튼튼한 요새를 건설하여 점령지를 장악하려고 했던 것이다. 십자군 성채는 군사들이 주둔하는 요새였을 뿐만 아니라 그 지역 행정기관의 역할을 했다.
예루살렘 입성에 성공한 후 약 200년간 십자군 통치 시대가 있었다. 당시 십자군은 오늘날 터키의 최남단 도시 안디옥에서부터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 이르는 지역을 장악했는데, 당시 십자군은 남북으로 700km나 되는 이 지역에 50개가 넘는 성채를 축성하였다고 한다. 이 성채들은 십자군 건축양식에 따라 하나같이 규모가 웅장했지만 이슬람 군대에게 모두 점령당하고 파괴되었으며,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에는 오직 ‘크락 데 셔발리엘’ 성채만 남아 아득한 옛날 격전의 현장을 증언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