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키키 브라더스! (www.waikikibrothers.com)이제는 중년이 된, 80년대 중반 남고교생 7명이 한국의 비틀즈를 꿈꾸며 결성한 밴드 이름, 이름은 우연히 붙여졌지만 여기에는 그들이 와이키키 해변에서의 생활처럼 멋진 인생을 꿈꾼 무의식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하지만 ‘희망’이란 종종 신기루처럼 무책임하게 나타나, 종국엔 끈끈이주걱풀처럼 끈적끈적 삶을 옥죄이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허상이 아니던가. 더욱이 현실은 꿈을 배반하는 반역자로 얼굴을 내민다.
가라오케가 생기고, 전자음악이 활개를 치면서 그들의 정직한 음악이 점점 설 자리를 잃게 된 것. 나이트 클럽은 커녕 환갑잔치나 미인대회 행사장 같은 곳에서 비감스런 보수를 받으며 근근히 연명해 나간다. 결국은 단원이 3명으로 줄어 리더가 된 성우는 쇠락한 모습으로는 절대 찾아가고 싶지 않았던 고향에 내려가, 그들과 이름이 같은 ‘와이키키 나이트 클럽’에서 연주를 하게 된다.
마지막 희망을 안고 찾아간 고향, 하지만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중년의 찌든 친구들과 동료의 배반으로 인한 팀의 해체, 이카루스처럼 바닥도 모를 심연으로 추락하기……. 아, 또 있다. 아련한 첫사랑 인희를 만난 것이다.
이 영화의 톤이 상승기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웃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감독은 중간중간 유머러스한 장면을 집어넣어 웃음을 유발시킨다.
아직 세상을 뒤흔들 것 같은 청춘의 에너지가 남아있던 시절, 벌거벗고 해변을 뛰어다니던 단원들의 천둥벌거숭이 같은 천진함이나, 진짜 같은 가짜 이영자의 너스레, 나훈아를 흉내내는 건지 아닌지 모를 기묘한 능청스러움으로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가짜 나훈아의 표정 연기, 실력은 없고 약삭 빠르기만 한 N세대 웨이터 기태가 사람은 적성에 맞는 일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어울리지도 않는 곳에 깊이 있는 말을 해서 웃게 만든다. 또 이제는 버스기사가 된 드러머 강수가, 여자 때문에 칼부림을 당한 신시사이저 연주자 정석과 장거리 통화에 빠져 운전을 할 때, 승객들이 사고라도 날까 봐 전전긍긍해 하는 겁먹은 표정이나, 정석을 위로하려고 ‘울지마’한 강수의 말에 으앙하고 울음을 터뜨린 아기의 해프닝이라던가....

아무래도 이 영화에서는 세 장면이 쉽게 잊혀질 것 같지 않다.
하나는 한 때 밴드 일원이었으나 지금은 공무원 생활을 하는 수철이가 생의 곤고함에 지쳐 “성우야,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사는 놈은 너뿐이야, 그렇게 하고 싶은 일하면서 사니까 행복하니?”하고 물을 때이다. 이제껏 성우의 추락하는 모습만 지켜본 관객들은 이 느닷없는 질문에 가슴이 아파온다. 행복하냐구? 말없이 앉아 있는 성우를 대신해서 관객들은 조용히 눈물을 훔친다.
또 하나는 성우가 룸싸롱 광란의 파티 현장에서 손님의 강압에 못이겨 나체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의 발가벗김. 쾌락을 위한 기름진 사장의 육체와 뼈의 형태까지 드러날 정도로 마른 성우의 몸피, 그리고 무력한 성우의 밥을 위한 노래, 밥을 위한 노래.................
하지만 마지막 남은 장면이 있어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 와이키키는 커녕 지방 도시와도 사뭇 떨어진 조그만 바닷가 마을로 떠나는 성우를 이제는 과부가 되어 채소 장사를 하는, 하지만 여전히 용기있는 첫사랑 인희가 따라와 준 것이다. 한 나이트클럽 무대에서 성우가 기타를 치고 돌아온 정석이 신시사이저를 연주하는 가운데 깃털같은 무대복을 입은 인희가 서서 “사랑밖엔 난 몰라”를 열창한다. 이미 여고 시절에 “I love Rock & Roll”을 파워풀하게 불러제켜 성우를 매료시킨 인희가 아닌가. 시선을 나누는 성우와 인희, 작은 위로나마 이제 그들에게 인생의 동지가 생긴 것이다. 인희의 노래는 미래를 위한 기도처럼 뜨겁게 뜨겁게 세상을 향해 울려퍼진다. “당신 없인 아무 것도 이젠 할 수 없어. 사랑밖엔 난 몰라…….” 회한과 감동의 도가니.

마지막 장면이 기억에 더 남는 것은 나와 같은 라인에 앉아 성우의 나체 연주를 보며 훌쩍이던 여인이, 별안간 “사랑밖엔 난 몰라”를 큰 소리로 따라불렀기 때문이다. 세상에, 영화관에서 그렇게 목청껏 노래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녀가 성우가 잘되기를 얼마나 바라고 있는 지를, 자신의 노래가 성우와 인희에게 힘찬 응원가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자기가 꿈꾼 와이키키에 가보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성우와 같은 사람이 나중에 신 앞에 갔을 때 가장 당당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왜냐하면 운명이 준 가혹한 시련과 모욕과 조롱에 결코 꺾이지 않고 자기 몫의 인생을 끝까지 묵묵히 살아낸 사람들일테니까.
이 영화가 흥행에 실패한 것은 영화 관객의 주류가 10대나 20대라 했을 때, 아직은 인생의 깊이를 모르는 젊은이들이 보기엔 너무 깊숙이 들어갔다는 면도 있다. 또 한편으로는 한번 쓰고 버리는 일회용품에 길들여진 이 시대의 사람들이 영화도 일회용처럼 가볍게 보고 나오면서 그대로 잊기를 원한다면, 이 영화가 남기는 몇몇 잔상이 버겁게 느껴질 지도 모른다는 점도 한몫한다.
하지만 세상살이가 잘 생긴 미남미녀들의 환상적인 사랑 얘기만큼 예쁘기만 하거나, 코메디나 조폭 이야기에서처럼 멋대로 재미있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현실을 잊기 위해 영화를 볼 수도 있지만, 가끔은 진실을 덮어버린 거짓 포장에 익숙한 우리들의 눈을 씻어내고 정직하게 세상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두렵지만 치료를 위해 상처난 속살을 들여다봐야 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