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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에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원령공주>후 은퇴를 선언했다 다시 강한 창작력으로 만든
작품이다. 그는 30여 년간 세계적인 작품을 다수 제작했음에도 10세 정도의 아이들을 위한 영화를
만든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래서 아이들을 기쁘게 해주고 싶어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비록 10세의 여자 아이가 주인공인 만화영화지만 어른이 보아도 작품성이나 오락면에서 뒤떨어짐이 없다.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를 잃어버리면 안된다는, 즉 아이에게는 다소 어려운 ‘정체성’의 문제가
제기되어 있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웃음보따리가 고속전차이 듯 관객을 태우고 그대로 질주하기 때문이다.
불평도 많고 소심한 소녀 치히로의 가족은 새로운 곳으로 이사한다. 가는 도중 길을 잘못 들어 터널을
지나게 되는데 거기에는 거품경기 시대에 지어져 이제는 폐허가 된 테마파크가 있다. 그것은 치히로의
아빠가 말하듯 거품이 빠지자 힘들어진 일본 경제를 비유하기도 한다.
웬지 모를 불길함에 치히로는 돌아가자고 조르지만 강한 호기심에 사로잡힌 부모를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엄마와 아빠는 한 음식점에 차려진 산해진미를 탐식하다 그만 돼지가 되고 만다. 그곳은 사람이
가서는 안되는 곳이었다. 귀신들의 세계였다. 치히로는 부모를 다시 환원시켜 인간세계로 나가기 위해
그곳 소년 하쿠의 도움을 받아 그곳을 지배하는 마녀 유바바가 경영하는 온천장에서 일을 하게 된다.
주 무대가 되는 온천장은 폐허가 된 테마파크처럼 일본 소비문화의 현실을 의미한다. 외형적으로는 800만의
귀신들이 와서 목욕을 하는 장소에 걸맞게 화려하고 떠들썩하고 북적이는 대중목욕탕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서로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는, 자신의 껍질 속에서만 바쁘게 움직이는, 그리고 손님이라면 ‘오물신’이라도
거절하지 않는 물신주의가 팽배해 있는 현대의 소비문화장소인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이 온천장은 손님이 오는 밤이면 불야성을 이룬다. 모두 소비문화에 중독이 되어 환경이 어떻게 되어
가는 지는 관심이 없다. 슈퍼울트라 오물신의 등장과 그의 목욕 장면은 많은 웃음을 자아내지만 원래
그는 현대의 산업폐기물에 오염된 ‘강의 신’이다. 결국 치히로는 잘못 되어가는 소비문화를 바로 잡아줄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바라는 작가 마음의 발현체이다.
유바바는 치히로를 일하게 할 때 의미심장한 계약을 한다. 치히로의 이름을 ‘센’이라 고쳐준 것이다.
이름이란 무엇인가. 유형무형 한 사람을 대표하는 총체성이며, 그 사람만이 가진 그 사람 본래의 참모습,
바로 정체성, 그 자체인 것이다. 하쿠는 자기 본명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원래의 자기대로 돌아갈 수
없다며 치히로에게는 절대로 본명을 잊지 말라고 당부한다.
이 ‘정체성’은 유바바(서구의 마녀)라는 서양정신이 온천장이라는 일본정신을 지배하고 있다는 우려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지만, 진부한대로 평범한 우리네 삶에서도 돌아볼 수 있는 문제를 제공한다. 황금에
어두워 자아를 잃어 가는 것은 아닌지, 꿈을 이루겠다고 정신없이 살고 있지만사실은 껍데기만 안고
헤매는 것은 아닌지, 외롭고 아프다고 하면서 서로를 느끼며 따뜻하게 살기는커녕 얼굴없는 요괴처럼
자기를 받아달라며 막무가내로 상대방을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치히로는
사실 굉장히 소심하다. 아주 평범한 소녀다. 얼마나 소심한지 처음 터널을 지날 때도 돌아가자고 조르다가
안되니까 엄마가 귀찮아 할 정도로 꼭 붙잡고 터널을 지난다. 또, 높은 계단 위에서 보일러실에 내려갈
때는 무서움에 질려서 똑바로 서서 내려오지 못하고 엉덩이 걸음으로 조심스레 내려온다. 이 부분은
상당히 자세하게 묘사 되어 있는데 아마도 치히로의 소심한 성격을 잘 보여주기 위한 의도인 듯 하다.
그렇게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건만 지나친 두려움 탓에 발이 미끄려져 폭주 기관차처럼 계단을 뛰어내려오게
될 때는 관객들의 폭소가 터져나온다.
이렇게 소심한 치히로가 소외된 얼굴없는 요괴에게 친절을 베푼다거나, 그 요괴가 모두가 열광하는 금덩이를
주려해도 받지 않는다거나, 목숨을 걸고 상처입은 하쿠를 살리기 위해 돌아오지 않는 기차를 타고 마녀를
찾아간다든가 하는 식의 일련의 마음 씀씀이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잊지 말라는 감독의
메시지이다.
이 영화의 덕목은 잘 짜여진 구성과, 웅대하면서도 세심하게 그려진 화면, 또 5분이 멀다하고 웃음을
유발하는 재미에도 있겠지만, 아마도 이러한 주제가 잘 맞물려져 만화영화로는 처음으로 세계3대 영화제
중의 하나인 베를린 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금곰상)을 차지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또 온천장의
모습이나 등장하는 귀신들이 일본전통의 복장을 하고 휴식을 취하러 오는 등 일본색이 상당히 짙지만,
존재의 본래 모습, 정체성이라는 문제를 던져주고, 현실과 정령들의 세계를 넘나드는 환타지를 소재로
삼아 많은 사람이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장치를 마련했다. 무엇보다도 다양한 캐릭터들의 예측할 수
없는 아기자기한 재롱잔치(?)가 이 영화의 큰 매력이다. 저런 상황에서도 웃음을 만들어 내는구나
하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세심하고 유쾌한 상상력이 가득 차 있다. 감독은 스탭진에게 ‘돼지
꼬리는 오른쪽 왼쪽, 어느쪽으로 감기지?’ 라는 질문을 해서 당혹하게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는 치밀하게
현실을 관찰하는 사람이다.
지난 6월, 26회 안시국제애니메이션 장편경쟁부문에서 우리나라 김성강 감독의 <마리 이야기>가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이는 우리나라 만화영화 수준이 이제 세계적인 수준에 올라서 있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한 셈이다. 올초 개봉된 이 영화를 보면서 나도 놀랬었다. 파스텔톤의 몽환적인 색감과 동화 속에서
나오는 듯한 캐릭터가 인상 깊었다. 단지 오락성에서는 약했다는 기억이 남아 있다. 요즘 우리 영화가
해외에서 일으키는 흥행성적이 만만치 않다. 머지 않아 우리에게서도 돌풍을 일으킬 작품이 나올 거라는
달콤한 희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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