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무 통권51호 | 2002 여름호
마라톤은 달팽이 걸음 / 선주성 마라톤칼럼니스트
  월드컵 열기로 뜨거워진 우리 가슴을 식히려는 듯 장마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아직도 머리 속에는 우리 선수들이 골 넣는 장면이 자주 떠올라 완전한 일상으로의 복귀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무덥고 습한 장마비는 가끔 나태해지고 싶은 저에게 좋은 핑계거리를 제공합니다. 그렇지만 여름에 내리는 세찬 비는 달리기의 또 다른 즐거움을 주기도 합니다. 여름철 낮에 비가 내리면 빗속을 뛰고 싶어 복장을 갖추고 달려나갑니다. 비가 내 모자 위에 떨어지며 내는 소리와 길바닥에 부딪히며 내는 소리의 차이를 느껴봅니다. 비를 맞으며 생명의 푸르름을 더해가는 들판을 즐깁니다. 어느덧 내 몸은 뜨거운 열기에 휩싸여 아지랑이가 피어납니다. 이 때쯤이면 자연과 내가 하나됨을 느낍니다. 그리고 무아지경. 달리기를 하면서 인생의 지혜를 많이 배우게 됩니다. 제가 주로 달리는 코스에는 가파른 언덕이 많습니다. 가장 긴 오르막은 약 800미터 정도에 이릅니다. 오르막을 뛸 때는 보폭을 짧게 하고 시선도 3~4미터 정도 가까운 앞을 본다는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언덕길을 계속해서 힘겹게 오르다 보면 언덕 끝이 어디쯤 있나, 내가 어디쯤 올라왔나 알고 싶어져 시선을 자꾸 위로 향하고 싶은 욕망이 생깁니다. 그렇지만 고개를 드는 순간 아직도 저 멀리 있는 꼭대기를 확인하며 힘이 빠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마라톤 장면마라톤 선수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코스는 직선으로 쭉 뻗은 대로(大路) 입니다. 아무리 뛰어도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이 들지 않는 그런 코스 말입니다. 같은 거리를 뛰어도 발전하는 느낌이 없을 때 더욱 힘이 듭니다. 인간은 심리 상태에 따라 스스로 의욕을 불어 넣을 수도 뺏을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멀고 힘든 길일수록 조금씩 꾸준히 나아가야 함을 우리는 많이 들었고 경험도 해 봅니다. 같은 육체의 힘,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마음가짐에 따라 현재의 의욕이 달라지는 것을 우리는 자주 느낍니다. 아무리 힘든 언덕이라도 꾸준히 올라가다 보면 언젠가 끝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뛰면 올라갈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지금 목표의 어디쯤 왔는가를 자꾸 확인하면 오히려 힘이 빠지게 됩니다. 지금까지 올라온 것도 힘든데 아직도 저렇게 많이 남았나 생각하면 의욕이 몸에서 달아나는 것입니다.
달리기를 통해 살을 빼겠다고 결심한 분들은 특히 매일의 변화에 너무 민감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살빼기로 달리기를 하는 분들 중 매일 자신의 몸무게에 변화가 있는지 저울에 몸을 올리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은근히 큰 변화를 확인하길 바라지만 목표와의 엄청난 차이에 대부분 실망합니다. 빨리 목표를 이루고 싶은 마음에 더 강도 높게 운동도 하고 다이어트도 하지만 기대한 만큼 변화가 없어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긴 언덕을 오를 때처럼 자꾸 목표를 바라보면 힘이 더 듭니다. 그저 바로 앞만 보고 꾸준히 한 발 한 발 딛고 나갈 때, 목표에 언젠가는 오를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때, 나의 한 발에 힘을 더 실을 수 있습니다. 1미터도 채 안 되는 한발의 보폭이지만 쌓이고 쌓이면 어느 순간 언덕 끝에 자신의 몸을 올려 놓습니다.

마라톤 장면아직 긴 세월을 살지는 못했지만 저는 인생에서도 그런 원리가 적용됨을 느낍니다. 스스로 세운 목표에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 자꾸 내가 어디쯤 있는가를 확인하면 더 힘들어 짐을 느낍니다. 저의 마음 속에 있는 조급함이 자꾸 목표를 쳐다보게 만들고, 아직도 멀리 있는 목표에 실망합니다. 이런 조급함이 저를 더욱 힘들게 만듭니다. 그러나 때때로 목표조차도 잊고, 하루 하루를 충실히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참 많이 와 있음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목표에 이르는 고통조차도 즐기며, 아니 고통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 언덕의 끝은 더 빨리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지난 해 여름, 달리기용품 전문매장을 견학하기 위해 미국에 간 적이 있습니다. 제가 간 곳의 매장 이름은 달팽이 걸음(snails pace) 런닝샵이었습니다. 달리기용품 전문매장의 이름이 달팽이 걸음이라니?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느릿느릿 움직이지만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는 힘이 얼마나 큰 힘인가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마라톤 풀코스를 뛰어 본 분들은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의 위대함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경부고속도로 서울 기점에서 오산까지 가는 그 먼 42킬로미터의 거리를 내가 이렇게 느린 두 발로 완주했다니. 스스로 놀랄 뿐 입니다.

2002년의 반을 넘어섰습니다. 연초에 세운 목표에 많이 다가가지 못했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이미 많이 와 있습니다. 그리고 너무 자주 목표를 확인하지 마십시오. 그저 달팽이 걸음으로 꾸준히 나아가면 언젠가는 목표에 이를 수 있다는 확신이 중요한 시기인 것 같습니다.

항상 즐기는 달리기 생활, 여유를 가지는 생활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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