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을 들었을 때였을까? 아니면 오만촉광이 빛나는 소위 계급장을 처음으로 달아본 그날이었을까? 이도저도 아닌 것 같다. 그럼 언제였을까? 그래, 그때 였으리라. 유격복귀 행군을 무사히 마치고 3사관학교 후문으로 들어온 그때였으리라.사람은 누구나 무엇인가를 해야겠다. 아니 하고 싶다는 열망을 갖고 산다. 심지어 배가 고파서 밥을 먹어야겠다는 생각 또한 그와 같을 것이다. 수없이 많은 열망중에 나는 왜 군인이라는 길을 걸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을까? 왜 하필이면 행군을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별 잡스런 생각이 다드나 할 수 있겠지만 가끔 일상생활이라는 용어로 나의 삶을 표현하고 있음을 느낄때면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질문이다.

어린시절 강원도 삼척에 오분리라는 작은 마을에서 살았었다. 6~7세때 였을까? 매년 어느 일정시기가 되면 어깨에 총과 무거운 짐을 메고 이상한 모자를 눌러쓰고는 보기에도 무거운 신발로 터벅터벅 거리며 도로변 양끝을 걸어가는 군인 아저씨들을 보곤 했었다.
처음에는 신기했고 다음부터는 아저씨들이 지날때면 집 담벽뒤 시원하게 흐르는 냇물을 벗삼아 달빛을 벗삼아 그렇게 행렬을 지켜 보며 막연히“아! 나도 저기에 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어두움 속에서도 묵묵히 앞을 향해 걸어가는 그 모습이 말없이 지켜보던 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고 어떤 고통이나 시련이 닥쳐와도 모조리 이겨낼 것만 같은 강인함이 무척이나 부러웠었나 보다.
그때부터였을까? 몸이 유난히도 약했던 나는 일년 중 반을 병원을 오가며 보내었었는데 어느날부터 병원을 다니지 않게 되었고 운동선수도 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래도 어렸지만 아프다고 투정부리면 군인이 될 수 없다 생각했나보다. 아무튼,“ 행군”이라는 두 글자는 내게 무척 소중한 단어이다. 처음 군인이 되고 싶다 생각하게 된 것도 가끔 내 모습을 돌아보게 하는 것도 그리고 가장 최고의 순간에도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3사관학교 사관후보생 시절 유격은 2주간 이루어졌다. 장마가 끼어서 인지 비는 2주내내 쏟아지다시피 하였고 훈련기간 중 나는 유격전 다쳤던 인대가 다시 접질러져 퉁퉁 부었고 압박붕대를 두개씩 감고 훈련을 받았다. 어렸을 적 아팠던 기억이 나서였을까? 누군가에게도 아픈 모습을 보이기 싫었고 약한 모습은 더더욱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픈 나에게도 운명의 시간은 다가왔다. 유격 복귀행군 60km가 남았을 때였다. 훈육장교님은 단 한번도 군장을 내려놓지 않고 모든 훈련을 다른 동기들과 함께 마쳤다고는 하나, 20kg에 달하는 군장을 메고 발목과 무릎 인대가 동시에 좋지 않은 상태에서 행군을 감행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시어 유격복귀 행군을 포기하라셨고 만약 하고 싶다면 군장을 내려놓고 임하라셨다. 하지만 다른 동기들과 다르게 그렇게 편한 방법을 택한다면 난 어쩌면 앞으로도 힘들때 군장을 내려놓았듯이 편한 방법을 선택하며 군인의 길을 갈것만 같아 불안하였고 무턱대고 고집을 피우자니 다른 동기들에게 혹여라도 중도 하차할 경우 더 악영향을 주진 않을까 고민이 되었다. 훈육 장교님께서도 내 마음을 아셨는지 다른 동기들과 동일한 조건으로 행군을 하되 단 앞에서 먼저 걸어가라 하셨다. 뒤에서 걸으면 더욱 힘들다고...
시간이 얼마쯤 흘렀을까? 한시간? 두시간? 발목은 기름칠하지 않은 기계마냥 삐그덕 삐그덕 거리기 시작하였고 어깨위의 군장은 마치 바위를 짊어진 듯 무겁게만 느껴지고 숨은 가파르고 발은 점점 터벅터벅 둔탁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렇게 걷고 또 걷고 반쯤 왔을 때 어느 초등학교에 들러 야식을 먹었다. 훈육장교님은 도착과 동시에 나의 건강상태부터 체크하셨고 심려를 끼쳐드리는 것만 같아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화장실을 다녀오고 동기들이 잠시 눈을 붙일때 쯤 나는 전투화를 벗었다. 발목이 끼일데로 끼어 벗기 어려웠고 혹여 땀이라도 차거나 물집이라도 생기면 더 힘들기에 분가루를 뿌리고 새 붕대로 감고 양말을 신고 땀이 차버린 무릎 아대도 새것으로 교체하고는 연신 발목과 무릎, 허리를 풀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