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가족과 함께 놀러 간 스키장에서 처음 야간 스키를 탔을 때 만났던 함박눈의 감동은 지금도 생생하다.

얼음장처럼 차지만 투명하게 빛나는 동짓달과 야간 조명에 반짝이는 스키장의 아름다운 야경을 감상하는 기분은 꽤 설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쏟아지는 함박눈 사이로 불빛이 은은한 슬로프를 타고 내려오는 기분은 무척이나 로맨틱하다. 밤에 보는 눈송이는 사방으로 흩뿌려져 시야를 어지럽히지만 낮과는 달리 따뜻하고 포근하다.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하얀 설원에 비발디 겨울 1악장의 날카로운 바이올린 선율처럼 바짝 든 맑은 정신으로 끝없이 이어진 슬로프를 내려올 때의 그것은 마치 인생을 살아내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낯설지만 설레는 느낌. 그때부터 난 함박눈을 좋아하게 되었다.

며칠 전 퇴근 길, 쭉 뻗은 원효대교에서 만난 탐스러운 함박눈은 그때의 흥분을 일깨우기에 충분했고, X-mas 이브, 종무식 날의 야근을 감수하면서 스키장에서 개최된 1박2일 일정의 워크샵에 참석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가 본 스키장이었다. 다행히 워크샵 일정도 일찍 끝났고 서울청 A, B씨와 야간 스키를 탈 수 있었다. 사람들이 많아서 생각보다 즐기진 못했지만 재미있었던 건, 같이 간 A와 B씨의 에피소드이다.

스노보드를 타던 A와 B씨는 곤돌라를 이용했고 곤돌라는 최상급자코스까지 올라갔던 것이다. 뒤늦게 상황 파악한 A, B씨는 그대로 곤돌라에 앉아 내려가려 했으나, 때마침 전망대(최상급자코스와 같이 이용)를 구경하고 내려가려던 C파트장님 일행과 마주쳤고, “와~ 잘 타나보다~”며 놀라는 C파트장님의 말씀에 그 둘은 그냥 내리고 말았다고 한다.

후에 듣기론 천천히 굴러가며 내려왔다고 말했으나, 개장시간이 끝나고 락커 앞에서 만난 A씨는, 사실 지친 기색이 역력했었다. 다음날 주문진에서도 후유증(?)으로 제대로 앉고 일어서지 못하는 등 (좀 미안하기는 했지만) 돌아오는 차 안에서 C파트장님과 계속해서 회자 될 만큼 재미난 에피소드였다.

다음날 오전 중에 분임토의 발표와 시상을 마지막으로 워크샵 일정은 모두 끝났다. 모처럼 강원도에 간 서울청 직원들은 아쉬움에 한 강릉청 직원의 안내로 강릉 경포대와 주문진에 잠시 들리기로 결정했다. 고독하고 서글픈 이미지를 주는 겨울 바다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뜨거운 태양이 곧바로 내리쬐고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여름의 바다보다는 세상사에 힘겨운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어 주고 또는 연인들에게 낭만을 기억하게 하는 겨울의 바다가 더 나은 듯하다.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보며 파도치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문득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바다에 섰었네.’라는 김남조님의 싯귀가 떠올라 괜한 감상에, 나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바다 갈매기가 남긴 발자국 위에 내 발자취를 남기고 돌아왔다.

한 가지만 더 A씨에 관한 에피소드를 덧붙이자면, 경포대에 오기 전에 바닷가 오징어를 사겠다고 중앙시장에 들렸는데, 주정차 위반으로 CCTV에 찍혀 오징어 값보다 더 비싼 과태료를 냈다고 한다.

한 회계연도를 마감하며 분주했던 작년 이 맘 때를 돌이켜 보면서, X-mas나 새해의 설렘은 접어 두고 올 겨울에는 하얀 눈이나 펑펑 내리길 바라는 소박한 기대가 있었는데, 뜻밖의 재미난 기억들로 가득한 겨울이 될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