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겨울을 싫어한다. 겨울이 오면 한 살 더 먹는 것도 속상하고,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기 때문에 겨울엔 항상 북극곰 몸매 못지않게 두텁게 껴입고도 덜덜 떨어야 하는 것도 싫다. 그러나 내가 겨울을 싫어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눈 때문이다.

하늘에서 내리는 하얀 눈이 낭만적이라며 좋아하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나도 한때는 눈을 꽤 좋아했다. 나뭇가지에 소복하게 쌓였다가 햇빛에 반짝반짝 하얀빛으로 빛나는 것도 예뻐 보였고, 서툰 솜씨로 눈덩이를 굴려 못생긴 눈사람을 만드는 것도 즐거웠다.

가끔은 지붕 위에 내려앉았다가 바람에 날려 부드럽게 쓸려가는 눈을 바라보며 시상을 떠올리기도 했고, 문방구 표 돋보기를 꺼내 들고 눈송이를 조심스럽게 잡아 결정 모양을 관찰하며 그 다양함과 정교함에 감탄하기도 했다.

그런 만큼 눈이 오는 날이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설랬고,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올해는 꼭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돼야 한다며 기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눈에 대한 그 모든 환상과 호감은 눈이 꽁꽁 얼어붙어 얼음으로 변했던 어느 겨울날, 산산이 깨지고 말았다.

당시 여고생이었던 나는 친구와 같이 매점으로 간식거리를 사러 갔다. 우리학교 매점은 교실과 다른 건물에 자리잡고 있어서 물건을 사려면 밖으로 나가서 외따로 떨어진 매점 건물을 향해 꽤 먼 거리를 걸어야 했다. 친구와 이것저것 수다를 떨면서 걸어가던 나는 어느 순간 갑자기 시야가 뒤집힌다 싶더니 꽈당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엉덩이와 뒤통수를 세게 부딪치고 말았다. 추운 날씨에 얼음으로 변한 눈에 그만 미끄러지고 만 것이다.

땅바닥에 쓰러져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친구는 크게 웃었지만 나는 시큰하게 몰려드는 통증에 정말 괴로웠다. 그리고 유난히 춥고 눈이 많이 왔던 그해 겨울, 나는 학원가는 길에 또 한 번, 슈퍼 가는 길에 또 한 번, 모두 세 번을 눈길에 구르는 수난을 당했고 파스를 엉덩이와 허리에 더덕더덕 붙이고 다녀야 했다.

그해 겨울을 계기로 나는 그렇게 좋아했던 눈이 싫어졌고 얼음에 대한 공포증도 생겨버렸다. 하늘에서 막 내린 하얀 눈은 그나마 봐줄 만했지만 땅에 눌러 붙어 거무칙칙한 색으로 변한 눈은 보기 흉했고, 얼음으로 변해 길거리를 점령한 눈은 무서웠다.

그리고 눈길에 넘어져 다치는 일이 몇 번 일어나자 난 눈이 오는 날이면 되도록 외출을 삼갔다. 정 나가야 할 일이 생기면 남들은 성큼성큼 걸어가는 눈길을 난 엉금엉금 기다시피 걸어갔다. 보다 못한 친구들이 손을 잡아 줄 테니 빨리 좀 걸으라고 할 정도였다. 그렇게 남들보다 훨씬 천천히 걷고, 길가의 가로등이나 기둥을 손이 닿는 대로 잡으면서 조심조심 했는데도 난 눈이 오는 날이면 종종 길거리에 엎어져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큰 웃음을 주곤 했다. 게다가 직장에 들어가 바쁜 생활을 보내게 되면서 지각의 원인이 되는 눈이 더욱 싫어졌다.

이제 나는 눈이 내리면 ‘저 지겨운 것 또 오네. 내일 걷기 힘들어질 텐데. 차 안 막히게 제발 그만 좀 와라.’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지난해 12월 중순 하얗게 내리는 올 겨울의 첫눈을 보면서 내가 느낀 감정은 낭만과 설렘이 아니라 짜증과 귀찮음이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을 보며 들뜬 마음에 일부러 나가서 눈을 맞고 눈에 대한 시를 쓰던 소녀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눈이 좋다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분들도 눈길에 몇 번 굴러보고, 눈 때문에 지각을 해 보신다면 눈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겨울이 조금 싫어질지도 모른다. 제발 이번 겨울은 눈이 조금만 왔으면 좋겠고 설령 오더라도 쌓이지 말고 바로 바로 녹았으면 좋겠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눈길을 엉금엉금 걸어가다 꽈당 구르는 모습을 선보이고 싶지는 않다. 올해 겨울은 무서운 눈을 피해 무사히 지나갔으면 좋겠다. 그러나 만약 얼어붙은 눈을 피하지 못하고 어느 날 누군가가 여러분 눈앞에서 앞으로 엎어지거나 뒤로 구르는 모습을 보인다면 웃지 마시고 조용히 모른 척 해주시기를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