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언필칭 실용(實用)이요 실용주의이다. 관념적이고 교조적인 이념 대결이 지나쳐 다른 의견이면 적대시하고, 합리적 의견조차 색깔론으로 덧씌워 허용되지 않던 상황을 생각하면,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실용주의가 제 잇속만 챙기는 저급한 이익추구의 변명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어 당혹스럽기도 하다.

날 세계 최강대국 미국을 있게 한 정신이 바로 ‘프라그마티즘’, 즉 실용주의이다. 실용주의에 입각하여 합리주의가 지배하고 철저한 준법정신과 신의성실의 원칙이 사회생활의 원칙으로 자리 잡아 현대의 선진국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실용주의가 그만한 역할을 할 수 있기까지는 청교도주의라는 높은 도덕성이 미국의 자본주의 속에 스며있었고, 신의성실의 원칙이 미국인 개개인의 마음속에 자리하여, 효율성과 능률이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던 때에 등장한 논리여서 쉽게 실용주의의 탁월한 효과가 발휘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사회는 아직도 천민자본주의가 맹위를 떨치고 있으며, 사회적 신뢰성이 상실되어 서로를 못 믿는 세상인데, 과연 실용주의만 외친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걱정이다.
사실 우리는 실용주의의 탄탄한 기초와 풍부한 내용을 갖고 있다. 바로 실학의 집대성자 다산 정약용 선생이 남긴 여러 글에서 발견할 수 있다.
다산 선생은 「오학론(五學論)」이라는 글을 통해 당시의 학문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했다. 먼저 성리학에 대해 비판을 했는데, 그것은 당시의 성리학이 관념과 교조에 치우쳐 분파가 끝없이 이뤄지고 다른 학파와는 대를 이어 대립하면서도 현실의 실제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해답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과거학에 대해서도 통렬한 비판을 하는데, 과거학이 과거시험에 합격하는 도구에 불과하고 관리로서 임무를 수행하는 실제적 능력을 함양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예리하게 지적했다. 요컨대 실용의 학문, 즉 세상에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학문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산 선생의 학문을 실학이라 하는 것이다.

다산이 독서의 순서에 대해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쓴 글을 보면, 실용주의의 기초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알 수 있다. “반드시 먼저 경학(經學)으로 밑바탕을 확실히 세우고, 그 뒤에 옛날의 역사책을 섭렵하여 정치의 득실, 치란의 근원을 알아야 하며, 또 모름지기 ‘실용의 학문’[實用之學]에 마음을 써서 옛사람들의 경제에 관한 서적을 즐겨 읽어 마음에 항상 모든 백성을 윤택하게 하고 모든 사물을 기르려는 마음을 둔 뒤에야 바야흐로 독서군자가 될 수 있다.”(必先以經學立著基址 然後涉獵前史 知其得失理亂之源 又須留心實用之學 樂觀古人經濟文字 此心常存澤萬民育萬物底意思然後方做得讀書君子:寄二兒) 음미해볼수록 의미가 깊은 말이다.

도덕성도 팽개치고, 역사의식도 묻어두고, 그냥 능력만 있고 보기에만 그럴싸하다고 해서 실용적인 것일 수 없다는 것을 다산은 주장했다. 경학(經學)을 통해 확실한 철학과 가치관을 세우고 역사책을 읽어 분명한 역사의식을 지닌 뒤에야 실용주의를 채택해서 경제학의 원리대로 만민(萬民)과 만물(萬物)을 살려내야 한다고 했다.

다산 선생은 실제로 세상에 도움을 주는 의술이나 정책에 관한 글을 많이 썼다. 그 예를 일일이 소개할 수 없을 정도인데, 이른바 ‘3농(農) 정책’도 한 예이다. 농업이 주된 산업인 당시 사회에서 농업의 진흥은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그것을 그저 당위적으로만 권면할 수는 없다는 것이 다산 선생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3농 정책을 주장했다.

첫째는 편농(便農)이다. 그렇게 힘들고 고단한 농사일, 어떻게 해야 편하고 쉽게 농사를 지을 것인가. 농업의 기계화를 통해 노동력의 합리적인 운영 등으로 농정의 개혁을 주장한다. 둘째는 후농(厚農)이다. 착취체제의 온갖 불합리한 제도를 고치고 바꿔 농민들의 수입이 넉넉한, 즉 소득 증대를 도모하는 정책을 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상농(上農)이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제 사회에서 선비 못지않은 신분으로 농민들의 지위를 끌어올려야 한다는 주장이다.

실용을 강조했다하여 다산 선생을 여유나 운치가 없는 분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해이다. 다산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 보면, 같은 일을 하고 같은 공업(功業)을 이룬다하더라도 가능하면 우아하고 품위가 높게 하라는 부탁을 자주했다. 둘째 아들 학유(學遊)가 집에서 닭을 기르는 양계농사를 한다는 소식이 오자 「기유아(寄遊兒)」라는 글에서 다산은 세세한 내용을 적어 보내며 양계를 해도 아담하고 품격 높게 하라는 간곡한 당부를 하고 있다.

“네가 양계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양계야말로 진실로 좋은 농사다. 그러나 양계에도 품위 있고 저속하며, 깨끗하고 불결함의 차이가 있다. 참으로 농서(農書)를 완벽하게 읽어 가장 좋은 양계법을 골라 시험해 보는데, 더러는 색깔과 종류로 구별해보기도 하고 홰를 다르게 만들어 닭을 기르며 남의 집 닭보다는 더 살찌고 더 잘 번식하게 해야만 한다.…” 과학적 농법에 의하여 닭을 길러 더 살찌고 번식도 잘하게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어떤 경우는 닭의 정경(情景)을 시로 읊어서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사물(事物)에서 물태를 파악하는 일도 해야 하느니, 이래야만 독서를 한 사람의 양계인 것이다”라는 멋진 이야기를 했다.

더 재미있기로는, “만약 이익만 보느라 의(義)를 보지 못하고, 기를 줄만 알고 기르는 취미를 모른다면 졸렬한 사람의 양계일 뿐이다”라는 경계의 말이다. 말을 해도, 닭을 길러도, 행동을 해도 이익과 의를 함께 생각하고 우아함과 품격을 높이도록 해야만 비난과 질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용이라는 것도 무엇을 위한 실용인지 바탕이 있어야 하고, 실제로 실용의 내용이 있어야 하고, 더하여 여유와 운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유행하는 실용주의를 말하면서 이러한 다산 선생 말씀을 잘 새긴다면, 실용주의가 또 하나의 분식(粉飾)이나 도그마로 전락하지 않고, 우리 시대를 풍요롭게 할 시대정신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