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무54 여름호::::::

이 영화가 갖는 미덕 중의 하나는 ‘기다림’이란 묵직한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둡거나 무거운 느낌이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맑고 따뜻한 여운을 남기는데 그것은 유머러스한 장면들과 함께 배어나는 등장인물들의 소박한 인간미 덕분이다.
중심을 꽉 잡고 있는 큰스님조차도 폐쇄적 종교적 귄위주의보다는 할아버지 같은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맑아지는 도념은 큰 스님이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도 쉽지 않지만 불법을 배운다는 것은 보통 인연이 아니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엄마만 기다리고, 동네 아이들과 싸움박질이나 하고, 덫을 놓아 토끼를 잡고 닭다리를 먹으면서 큰스님만 모르면 된다고 생각하는 천진무구한 어린아이일 뿐이다. 또 아직 세상에 대해 특히 이성에 대한 번뇌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정심은, 산에 놀러온 여자들에게 아는 체를 하다가 망신을 당하고, 큰스님만 보면 포경 수술비를 달래서, 그 돈을 받아들고 날 듯이 산길이며 바닷가를 뛰어가는, 구도의 문제로 고통받는 불제자가 아닌 보통 청년의 모습을 더 많이 보인다.

아름다운 영상도 또 하나의 장점인데 본격적인 종교영화가 아니면서도 절집을 택한 것은, 함세덕의 동명 희곡을 각색한 이유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우리 것을 보이기 위한 감독의 의도가 강한 듯 이 영화에는 우리 것이 온통 가득 차 있다.

풍경이 빼어나다는 산사를 돌아다니며 찍은 사계의 아름다운 영상미가 그렇고, 절집을 중심으로 한 소품들, 대나무로 나란히 연결해 놓은 약숫물돌항아리며, 돌의 모양을 그대로 살려 쌓은 구름돌다리, 소박한 사람들의 희망을 쌓아놓은 무수한 작은 돌탑들, 이끼낀 석등, 식물의 생김을 그대로 이용한 차 도구, 산사에 핀 수수한 국화, 텃밭의 흰도라지꽃, 산을 하얗게 수놓는 억새풀, 돌다리와 그림을 맞춘 누각들이 쉴새없이 우리의 눈을 정화시켜 준다.
아, 저것이 우리 강산이고 들이었지. 어쩌면 그리도 정다웁고 예쁜지. 새삼 아름다운 우리 것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리고, 영화의 끝부분도 쉽게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긴다. 흰눈이 온세상을 하얗게 덮던 날, 도념은 엄마를 찾아 절을 나선다. 미망인의 양자가 되는 길을 막은 큰스님이지만 방을 향해 정성스레 합장을 하는 모습이 마음에 남고, 현수 아버지가 바랑을 메고 나서는 도념에게 “넌 찾을 게 있어 참 좋겠다.”고 한 말 역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발이 푹푹 꽂히는 눈밭을 가는 도념의 뒷모습에서 의지가지 없는 세상 속으로 동승이 혼자 떠나간다는 걱정보다 희망을 보는 것은, 아마도 그것이 가만히 앉아 주어진 운명에 순종하겠다는 소극적인 마음자세나 피해가겠다는 패배의식이 아니라, 지향하는 바를 용기있게 찾아나선 적극적인 자세에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끝내 엄마를 찾지 못하더라도 그가 또 다른 면에서 인간적 성숙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우리는 할 수 있다. 인간은 그렇게 기다리고 참고 넘기며 때론 깨지더라도 부딪치며 성장하고 성숙해가는 존재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