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화려함을 자랑하는 끝 무렵이면 배꽃이 화사하게 피어납니다. 우리 동네 제가 달리기를 즐기는 코스에는 배밭이 늘어서 있습니다. 유명한 태릉 먹골배 라인이 이어지는 동네입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아파트 사잇길을 빠져 나가면 바로 방울방울 맺혀 있는 배꽃이 저를 반깁니다. 과수원 사잇길을 뛰면서 약간 붉은 기가 도는 하얀 벚꽃과 누런 기가 있는 하얀 배꽃이 어우러지는 곳에 이르면 저절로 걸음이 느려집니다. 터널처럼 양쪽에 늘어선 나무들 사이로 뛰면서 새소리를 감상하고, 풀냄새를 맡으면 마치 상념의 바다에서 열반의 세계로 빠지는 길을 지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달리기를 하면서 가장 행복하게 느끼는 순간입니다. 내가 뛸 수 있고, 이런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는 ‘지금’이 나에게 가장 행복합니다.

공군사관학교에서 생도들에게 3년간 독일어를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사관생도들은 임관까지 많은 어려운 과정을 거칩니다. 생도들의 마음 속에는 항상 ‘임관까지만 참자’라는 인내의 결의가 있습니다. 대단한 인내심과 절제가 없으면 사관생도로서의 명예를 지키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어느 날 독일어 시제를 가르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미 영어 실력도 어느 정도 있는 생도들에게 새삼 시제를 가르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간단히 문법적인 설명을 하고 ‘현재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말을 할 때 ‘현재형’을 씁니다. 그리고 개념적으로 정의되어 있지 않지만 분명 ‘현재’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현재’라는 관념은 무엇일까요?
현재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그 시간은 과거가 되고, 미래가 순간적으로 다가옵니다. 어쩌면 현재라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현재’라는 개념 속에는 ‘상황’ 개념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당장의 몇 초가 현재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상황에서는 몇 달이 현재일 수도 있습니다. 화자의 주관적인 ‘상황’의식이 그것을 결정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대부분의 사관생도들이 지금 처해 있는 시간을 미래의 행복을 위해 견뎌내야 할 고난의 시간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저도 고등학교 때의 시간을 대학을 가기 위해 희생하는 시간으로, 대학 시절은 그 이후의 시간을 위해, 취직해서는 그 다음을 위해, 결혼해서는 아이들을 위해... 저의 현재는 항상 미래를 준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현재를 살지 못하고 항상 미래를 위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현재를 희생하면서 꿈꾸던 미래가 다가왔지만 그 때도 그 시간을 즐기지는 못했습니다. 항상 또 다른 미래를 위해 현재가 된 그 미래의 시간을 희생해야만 했으니까요.이런 논리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면 결국 나는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만 현재를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는 오랫동안 행복을 미래의 일로 생각해 왔습니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것은 어떤 조건이 충족되면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옵니다. 저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이런 ‘플러스 행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플러스 행복을 추구하다 보니 아직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는 지금은 행복하다고 느낄 수 없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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