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0년
한양대 연극영화과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논산 육군 제2훈련소(현
육군훈련소)에 입대한 나는 얼굴이 허여멀건 서울 놈인데다
키가 당시로서는 큰 편인 175cm라 소대의 리더격인
향도를 했다.
당시 기억에 남는 사람은 지난번 훈련 기수에서 유급된
두 훈련병이었다. 순박한 충청도 산골 청년들이었는데 한글을
전혀 몰랐다. 아마 그것 때문에 유급된 것 같았다. 그
사실을 안 이후 우리 소대원들은 바쁜 훈련 중에도 시간을
내 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낙오하지 않도록 신경을 써줬다.
결국 이들은 한글을 깨쳐 미군부대 카투사병으로 착출돼
갔다. 전출 가기 전날 우리는 부둥켜 안고 한참을 울었다.
이들은 당시 고급 담배였던 파고다를 정성스레 포장까지
해 선물하고 떠났는데, 거기 적혀있던 ‘선생님, 고맙습니다’라는
글귀가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신병 훈련을 마친 뒤 2군사령부 5관구로 발령을 받았다.
한겨울의 대구는 왜 그리 춥던지. 하지만 날씨만큼 매서웠던
것이 선임병들의 텃세였다. 암호병으로 통신부대에서 근무하던
시절, 숫자 하나를 잘못 계산하면 명령 체계에 혼선이
생기는 부서여서 그랬는지 선임병들은 후임병을 혹독하게
대하곤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이른 바 ‘자장가 사건’이다.
자대 배치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당직을 서야
할 선임병이 나를 부르더니 대신 당직을 세우고
자버리는 것이었다. 게다가 너는 서울 놈이니 노래를
잘할 것이라며 자기가 잠들 때까지 자장가를 부르라는
것이었다. 노래를 좀 부르긴 했지만 홀어머니께도
불러드리지 않았던 자장가를 비슷한 연배의 선임병에게
불러줘야 한다고 생각하니 처량하기도 하고 자존심도
상했다.
어쩔 수 없이 생각나는 자장가 한 곡을 골라 가능한
한 선임병이 빨리 잠이라도 들도록 정성껏,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좀 처량한 곡조로 불렀다. 노래를
부르며 부모님 생각까지 나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소리없이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하지만 처음엔 얄밉게 행동한 선임병들도 시간이
흘러 친해지자 유명한 대구 막걸리를 사주는 등
무척 잘해줬고 나중에 정이 듬뿍 들었다.
병장이 되자 나는 전공인 연극을 군에서 활용할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기 시작했다. 연극을 병사들의
훈련 방법으로 써보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당시 미국에서는 연극으로 하는 훈련(Drama
in Education)이 유행했는데, 몸으로
부딪치며 배우는 교육 방식이 병사들에게 더욱 흥미로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후임 병사들과 함께 4~5개월 정도 준비를 했다.
교육 방식은 예절 교육 막사, 정신 교육 막사,
슬라이드 상영 막사 등 총 다섯 개의 막사를 만들어
병사들이 지나가면서 교육을 받도록 했다. 나는
막사가 내려다보이는 20cm높이의 물탑에 앉아
총연출을 했는데, 호응이 좋아 교육은 3개월간
이어졌다.
지금 생각하면 일개 병사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의아하기도 하지만 아마도 윗분들이 나를 믿고 일을
맡겨주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해본다. 그 결과
당시 2군사령관이던 장도영 장군으로부터 표창도
받았다.
3년 남짓한 군 생활에 어려움이 없진 않았지만 나는
비교적 무난하게 군 생활을 마친 것 같다. 거기에는
입대 전 읽은 책 한권이 큰 도움이 됐다. 고미카와
준페이의 <인간의 조건>이라는 책인데,
지금도 군 입대를 앞둔 젊은이들에게 이 책을 읽으라고
권하곤 한다.
주인공의 인생역정을 좇다보면 내가 이사람만큼 고생했겠는가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러니 절로 군 생활이 편하고
즐거워졌다. 남자에게 사랑렝活切부조리렸貧鍛舊遲�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알고 나니 군대의 모든 일이
아름답게 느껴졌고, 약한 자의 편에 서면서 강한
자를 내 쪽으로 유인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통신부대에서 근무할 당시 가끔 창문을 열고 시원한
바깥 공기를 쐬며 담장 너머 도로를 바라보는 버릇이
있었다. 지금도 보안부대 창문 밖 밤길을 똑똑
구두 소리를 내며 걸었갔던 예쁜 아가씨의 뒷모습이
아른거린다. 문득 가수 남일해의 노래 ‘빨간 구두
아가씨’가 듣고 싶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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