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심이 없다면 목표를 갖지 마라’라는 문구.
날 아침, 화장실 문 뒤에 붙어있는 이 구절을 보았다. 그것은 날 한참동안이나 생각에 빠져들게 하였다. 불과 며칠 전, 나는 드디어 제대를 140여 일 앞둔 수경이 되었다.
사람들이 소위 ‘널럴하다’고 생각하는 자리에 오른 것이다. 이제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하라’는 주위 사람들의 농담 섞인 충고들이 귀에 들리기 시작한다.
떨어지는 낙엽에 대해 생각해보는 한편으로, 그보다 더 먼저 봄날을 알리는 푸른 새싹들이 돋은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사실이다. 그 모습을 보면, 내게 일어났던 지난 일들이 새싹처럼 계속해서 솟아나는 것을 느낀다.

아버지가 영국에서 경영학 박사 과정을 밟으실 때, 어머니는 딸 셋과 아들 하나를 낳으셨다.
나는 그 중 셋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끔 사람들은 외아들인 나를 두고 막내라고 오해하기도 했다. 내가 태어난 뒤 곧바로 내 동생이 태어나면서 우리 가족은 한국으로 돌아올 계획을 세웠고, 그 바람에 나는 혼자 한국에 들어와서 한동안 외할아버지 할머니 댁에서 지내게 되었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는 워낙 등산을 좋아하셔서 아직 어린 나이였던 나를 데리고 산에 올라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곤 하셨다.
우리 가족이 모두 한국에 돌아와 자리를 잡을 무렵 난 이미 초등학생이 되어 있었다.
그 때 나는 일요일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할아버지 할머니가 나를 데리고 산에 오르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는 나를 부모님처럼 아껴주셨고,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등산하는 것이 너무 좋았다. 사실, 집에서의 내 생활은 여자형제들 사이에 치어 항상 전쟁의 연속이었다. 아버지께 도움을 청해 봐도 항상 어머니 편만 드셨기에 원망도 많이 하고, 남자는 나 혼자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가슴에 한이 맺힐 지경이었다.
그런 때 나를 항상 예뻐해 주시고 지켜주시는 할아버지 할머니와의 일요일은 목이 빠지도록 기다려질 수밖에 없었다. 여자 형제들 틈에 끼어 작아 보이던 나는, 지금 어느새 훌쩍 커버려 홀로 군대라는 낯선 곳에 와 있다.

내가 한국에서 초등학교 5학년 1학기를 마쳤을 때, 우리 가족은 영국으로 갔다. 할아버지 할머니와의 이별이 견딜 수 없이 가슴 아팠지만 한편으로 비행기를 타고 내가 태어난 곳, 고향으로 간다고 하니 어린마음에 호기심과 설레임이 더욱 컸던 듯하다.
그렇지만 막상 영국에 와보니 고향이란 말이 무색하게 모든 것이 낯설었다. 아무리 기억을 되살려보려 애써도 너무 어렸을 때라 그런지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저 내 옆을 스쳐지나가는 나와 다르게 생긴 외국인들이 신기하게만 보였다. 나는 하루빨리 적응하겠다고 다짐하며 새로운 생활의 시작에 마음이 한껏 들뜨고 부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