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를 청탁받은 1월에는 좋은 작품들이 많았습니다. 많이 본 것은 아니지만 본 작품들이 다 마음에 들었습니다.

먼저
는 한 플레이 보이 이야기입니다. 처음엔 로맨틱 코미디처럼 감각적이고 가볍게 연애를 하는 알피의 생활로 시작하지만, 마지막에는 바람둥이의 정체성을 생각하게 하는 지적인 물음으로 끝이 납니다. 어찌보면 아주 사소한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두 대목 때문에 이 영화가 은근히 남습니다.

하나는, 여자를 떠나보내고 싶을 때 그가 하는 것은 오직 “아무 말도 안 한다”는 무언의 행위라는 겁니다. 여자들이 떠나면서 말합니다. 바람둥이답게 헤어지는 방법도 잘 알고 있다고, 그게 바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라고. ‘알아서 하라’는 의미가 담긴,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 앞에서는 아마 하지 않을 이 침묵 앞에서 여자들은 모멸감을 느끼고 더 이상 그의 곁에 머물 수 없게 되는 거지요. 사실 보통 사람들 역시 종종 말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고 침묵으로써 자기 의사를 대신하기도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 이 침묵은 어떤 웅변보다도 백 배 천 배의 강한 뜻을 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알피의 문제는 책임있는 말을 꼭 해야 할 때조차 아무 말도 안 한다는데 있습니다. 싫은 소리 한 마디 안 하고도 상대를 보낼 수 있는 이 방법은 그를 편하게 해 주지만, 그것 때문에 또 그는 가장 친한 친구 부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게 됩니다.
두번째 대목은 바로 그가 “상처를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변명하는 장면입니다. 로맨틱 코미디에서라면 그저 귀여운 속물일 수도 있는 알피는 자기가 가벼운 만큼 상대녀들도 가볍게 즐기고 있을 뿐이라는 오해를 하게 됩니다. 그러니 자기 때문에 누군가 아파할 거라는 염려는 애시당초 그와 인연이 없지요. 하지만 알피가 단순히 즐길 생각을 하고 있을 그 때,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면 그녀는 상처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의 고귀한 감정이 싸구려로 대접 받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테니까요. 진부한 이 대사가 마음에 남는 건 극 중 상황과 잘 맞아떨어지는 대사여서도 이겠지만, 평범한 우리 네의 어떤 모습을 거울처럼 그에게서 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보통 사람인 우리 역시 내 식대로 남을 이해하고 결론짓고 행동함으로써 수없이 다른 사람들을 아프게 하니까요. 설사 그런 의도가 털끝 만큼도 없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