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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이 지난 젊은 날의 군대 시절이지만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아련한 추억이 있다.
그때 그날은 정말 더웠다. 지열까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찐다’는 표현이 더 적절했다. 임진강변의 둑길(제방)을 따라 구축된 벙커가 ‘현장’이었다. 아침 나절에 철수한 잠복경계조가 곤히 휴식에 들어간 시간이었다. 한때 엄습한 적막이 더위를 더 부추기는 것 같았다.
내가 지휘하던 벙커는 임진강(강폭 평균 1km)을 사이에 두고 적과 대치해 있었다. 24시간 긴장을 먹고 사는 최전방. 그러나 이따끔씩 허락되는 한가로운 시간, 그때 바라보는 전방의 풍경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선임하사와 야간투입조 고참들이 ‘육군삼계탕’(?)을 준비 중이었다. 오늘의 메뉴는 ‘곱배기 파티’. 삼계탕에 무슨 곱배기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사실은 끊는 라면에 달걀 두 개를 뜻하는 말이었다.
어디선가 ‘소대장님!’ 하는 소리가 들렸다. 긴장과 여유가 대치하는 한낮 풍경 속에 갑자기 우리 소대 꼬마 일병이 등장한 것이었다. 가물거리는 먼 곳에서도 김일병의 움직임은 우리 소대원이라면 눈 감고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작은 체구에 비스듬히 멘 M 1 소총과 헐렁하게 걸친 철모가 부딪치면서 항상 소리가 요란했다. 김일병은 5리길(2km)떨어진 중대본부에 다녀오는 길이었고 등에 배낭이 가득해 보였다. 뭘까? 궁금했다.
“소대장님께 온 편지가 산더미입니다.”
김일병의 보고대로 배낭 속 편지에는 봉투마다 ‘이윤성 소위님께....’로 시작되는 서울 모 여대 발신 위문편지가 가득했다. 사정은 이러했다. 휴대용 라디오로 즐겨 듣던 프로그램 가운데 청취자가 보낸 편지로 일상사를 아기자기하게 엮어가는, 여성 진행자가 꽤 돋보이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얼마 전 위문편지를 부탁하는 사연을 띄웠고 그 결과가 도착한 것이었다. 편지를 보내던 그날도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벙커 속이 찜통처럼 찌고 있었고 여성 진행자의 소리가 청량제처럼 더위를 식혀 주었기에 불현듯 용기를 내 사연을 적어 보낸 것이었다.
위문편지는 소대원들에게 골고루 나뉘어 돌아갔고 잽싼 친구들은 어느 새 빼앗다시피 움켜 쥔 편지를 돈다발 세듯 펼쳐 보이며 괴성을 질렀다. 소문은 순식간에 부대 전체로 퍼졌다. 여대생 애인을 둔 소대로 소문이 확산되면서 소대장은 영웅 대접를 받았다. 소대원 또한 중대원 모두의 부러움을 샀다. 필경 그 인연이었으리라. 제대하고 내가 택한 직장이 바로 방송국이었으니 말이다.
사실 대학 시절부터 기자가 꿈이었던 나로서는 외부와 단절된 최전방 부대에서의 내무반 생활이 꿈을 영글게 하는 단련장이기도 했다.
KBS의 메인 뉴스인 ‘9시 뉴스’를 진행할 때였다. 6·25특집으로 뉴스 앵커의 전방 탐방 코너가 기획됐다. 내가 소대장이 돼 직접 부대를 지휘하는 역할이었다. 26년 전으로 되돌아가는 순간이었다. 강원도 동부전선의 비무장지대(DMZ)에서 철책 경계 근무를 하는 것이었다.
부대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가슴이 뛰었다. 밥 냄새가 구수한 진중 구내식당, 내무반 점호, 부릅뜬 눈과 바짝 ‘기’가 든 부동자세, 오직 90도 직각만이 허용됐던 내무반 관물 정돈대에서 26년의 시간이 정지한 듯 옛날 모습 그대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당시 내 모습이 6·25기념일 그날 ‘9시 뉴스’에서 톱으로 방영됐다. 뉴스 진행자와 일선 소대장이 함께하는 가장 생생한 보도로 극찬의 영광을 안았음은 물론이다.
지금도 인천의 앞마당 연평도 근해에서 있었던 서해 교전을 상기할 때면 장렬히 산화한 젊은 그들에게 절로 머리를 숙이게 된다. 현역 군인들의 선배로서 이들이 산화하지 않아도 좋을 정도로 주위 여건을 마련하지 못한 책임 또한 통감하고 있다. 때문에 국방예산 증액은 늘 나의 주 관심사이고 전투력 중강 못지않게 군 복지 향상에도 누구보다 앞장서고 있다.
바쁜 정치 일정 속에서도 예전 부하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갈 때가 많다, 요즈음도 힘들때면 군 복무 시절을 떠올린다. 즐거울 때도 그때를 생각한다. 지금도 그 시절 전우들과 소주잔을 기울이는 기억을 되살릴 때가 가장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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