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 불만이 많은 공무원 K씨, 그의 불만의 대부분은 매사를 원칙과 비원칙으로 나누어 원칙은 ‘정의’요 원칙이 아닌 것은 모두 ‘불의’라는 그의 독특한 이분법적 ‘정의관’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니다. 따라서 로맹롤랑이 말한 “부정을 미워할 줄 모르는 사람은 정의를 사랑하지 못한다”라는 문구가 그의 책상 유리 밑에 끼워져 있는 것도 정의에 관한 그의 사유체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빼곤 더 이상 흥미거리가 되지도 않는다.
그런데 원칙과 정의만을 고집하는 그의 자세는 기안문의 결재에 있어서도 예외일 수 없어 종종 업무상 ‘트라블’을 일으키곤 한다. 그에 의하면 자신의 손 볼데 없는 (적어도 국문법적 형식에 관한 한)기안을 계장이나 과장이 납득할 만한 이유없이 ‘훼손’하는 것은 무지에 의한 횡포이며, 그 횡포는 곧 ‘불의’에 다름 아닌 것이다.
오늘 일 만해도 그랬다. K씨가 기안하여 올린 “~아래와 같이 시행코자 합니다”로 시작하는 내부결재 문서를 “~아래와 같이 시행코자 하오니 결재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로 계장이 수정해버린 것이다. 게다가 한술 더 떠 계장은 “바랍니다” 밑에 “아래”라는 한 줄을 더 집어넣었으니 K씨가 흥분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아니, 결재해 주시기 바란다고? 결재 안 해주면 어쩔건데? 그리고, ‘아래’는 또 뭐야? 본문에 ‘아래 또는 다음과 같이 한다’고 했으면 그 밑에 붙는 ‘1, 2..’라든지 ‘가, 나...’ 등이 곧 ‘아래’이고 ‘다음’ 내용인 거지, 거기에 ‘아래’나 ‘다음’이라고 다시 표시한다는게 대체 말이나 돼?” 결재완료된 자신의 기안문을 K씨는 병든 애완견을 걱정하듯 들여다보았다. 갑자기 끊었던 담배생각이 났다.
그를 아는 동료나 직장 선배들은 “선택과 취향의 문제일 뿐, 사소한 것에 목숨걸지 마라”고 평소 그에게 충고하곤 했는데, 그 충고 뒤엔 또한 언제나 “승진에나 신경쓰라구!”라는 후렴멘트를 갖다 붙임으로써 동기들보다 승진에 뒤쳐진 그를 비아냥대는 것도 결코 빼놓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정의와 이로움은 병존 가능한 가치가 아님을 잘 알기 때문이다. 오직 “국어를 어법에 맞게 사용하는 일은 옳고 그름의 문제이지, 결코 취향이나 개성에 따른 선택영역이 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된 관심사이자 확고한 신념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구청 안팎을 막론하고 K씨만큼 학문적, 논리적 내공을 다진 공무원도 드물었다. 만일, 그에 대한 관심과 궁금증으로 기꺼이 그의 이력과 행적을 캐 들어가 본 사람이라면 그의 고집이 결코 돈키호테식 정의관념에 사로잡힌 ‘소영웅주의’의 발로가 아니란 걸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중고교 재학시절부터 줄곧 교지의 편집 일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지난 청년시절 근로청소년들을 위한 ‘야학’에서 국어과목을 맡은 것이 소문나 입시학원으로부터 논술과목을 제의받았던 일 하며, 일찍이 문학지에도 시와 소설로 각각 이름을 올려놓았던 ‘전문가급’ 실력파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정작 그리 많지 않다. 결국 그의 ‘정의’는 그의 학문적 확신에 의한 양보나 타협 비대상의 ‘양심’인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