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참시절, K씨는 ‘제증명 발급’ 업무를 맡으면서부터 민원인과의 옥신각신으로 인해 윗분들의 심기를 적잖이 불편케 해 드렸었다. 이름하여 버들 류(柳)씨 사건! 버들 류(柳)자를 성씨로 사용하는 민원인에게 K씨가 ‘두음법칙’을 들어 ‘유 아무개’로 증명을 발급하자 기어이 ‘류’자 표기를 고수하는 민원인과의 마찰이 끊이지 않았던 것. 심지어 “네놈이 뭔데 남의 성을 갈려 하느냐?”라며 험악한 상황까지 벌어졌던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으나, 그 때마다 주위 고참이나 상사가 나서 민원인의 요구를 수용토록 ‘사건’을 잘 무마하는 바람에 위기를 넘기곤 했는데. 한 번은 ‘柳’씨 종친회로부터 받은 공식 ‘항의서’로 인해 K씨는 한동안 곤욕을 치렀던 일도 있다.
이 같은 다툼은 ’96년 “성씨의 한글 표기에도 두음법칙을 따른다”라는 ‘대법원 호적예규’가 확정되면서 많이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강공’으로 나오는 민원인에게는 아예 이름을 한자로 써줘 버리는 나름대로의 요령을 개발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무렵 K씨는 C 신문에서 자사의 논설주간의 이름을 ‘류 아무개’로 표기하는 것에 대해 독자투고를 통해 수차례 지적했으나 무응답으로 일관하던 C 신문에서 어느 날 모든 칼럼 저자의 이름을 한자표기로 바꿔 게재하는 좾현재까지도좿 웃지못할 사연을 만들어내기도 했으니, 이는 K씨의 고집이 결국 ‘옳은 것’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이처럼 K씨의 올바른 국어사용에 관한 관심은 가히 경의를 표하기에 충분할 정도지만 때론 그 수고와 열정으로 인해 K씨 가슴 한켠에 종양처럼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1988년 1월 한글맞춤법과 표준어규정이 고시될 때에도 피끓는 한 청춘의 ‘불의’에 대한 저항정신은 당시의 문교부, 국어연구원 및 한글학회 등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아니, 사람들이 비표준어로 많이 쓴다고 해서 ‘무우’를 ‘무’로, ‘마춤복’을 ‘맞춤복’으로, ‘상치’를 ‘상추’로 바꾼다는 말입니까? 왜, ‘네가’는 그냥 둡니까? 같은 논리를 들어 ‘니가’로 바꾸지 그랬습니까? 그런데, 그 정도라면 굳이 이해 못할 바도 아니지만, 서술형 종결어미 ‘습니다’는 대체 뭡니까? 전음의 자음 받침이 후음의 모음에 영향을 주도록 한 우리의 음운법칙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억지 아닙니까? 그렇다면 또 ‘니다’ 없이 ‘했음’으로만 끝나는 경우는 왜 ‘했슴’이 아닌 ‘했음’이 돼야 하지요? 원칙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결국 K씨의 불만은 해소되지 못한 채 K씨 또한 대부분을 그 ‘불의’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K씨의 일화는 셀 수도 없이 많고, 또 관심 밖의 제3자에겐 제법 재미를 주기도 하지만 어떤 사연은 찰리채플린의 희극처럼 결코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진한 페이소스를 담고 있었다.
가족이 식탁에 모인 초겨울의 어느 날 저녁의 일이었다. TV 뉴스시간에 들려오는 기자의 멘트에 K씨는 순간적으로 반응했다. 거의 동물적이라고나 할까? “아니, 뭐 저런 친구가 다 기자노릇을 하고 있나? 배추값이 포기당 1,000원에서 2,000원으로 올랐으면 (한)배가 오른 것이지, 두 배가 올랐다고? 굳이 ‘두 배’를 어감상 강조하고 싶거든 ‘두 배가’가 아닌 ‘두 배로’ 올랐다고 하면 될 것을...” K씨는 아이들 앞에서만은 자중하리라던 다짐을 어느새 잊고 있었다. 그러면서, “야! 동해야 넌 어떻게 생각하니?” “..............” “뭐를 요오?...” 습관처럼 중1짜리 큰 녀석의 목소리는 벌써 움츠러들고 있었다. 애초에 큰 녀석에게 신통한 답변을 기대하고 물음을 던진 건 아니었다. 한 달 전쯤 녀석이 대화 도중 이순신의 ‘호’를 “불멸의요!” 라고 자신있게 대답한 ‘사태’가 발생한 이후 K씨는 큰 녀석에 대한 기대와 신뢰수준을 대폭 하향조정할 필요를 느끼고 있던 중이었으니까... 갑작스런 아비의 물음에 안경너머 큰 눈을 껌벅이던 녀석을 구원하고 나선 건 K씨의 아내였다. “또 시작이네, 좀 대충 살면 안돼?” 하지만 ‘대충’이나 ‘대강’이란 단어야말로 얼마나 남편의 ‘정의본능’을 자극하는 금기용어인지 결코 모르지 않는 아내이고 보면, 이 순간 아내의 언어구사능력이나 상황대처요령 점수는 ‘D’도 과분한 나머지 ‘F’에나 가까운 것처럼 여겨졌다. 결국 이 상황에서의 K씨의 침묵이란 곧 그의 ‘정의관’에 배치되는 ‘죄악’이었으므로 K씨 가족의 자유는 K씨의 훈시를 듣는 약 5분간 구속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