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처럼 직장과 가정 어디에서건 고립무원인 것 같은 K씨에게도 언제나 그의 편에 서서 응원해 주는 열렬한 팬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그의 늦둥이, 7살난 ‘남해’다 녀석은 제 엄마 아빠 사이에 작은 언쟁이라도 벌어질라 치면 잽싸게 나서서 “엄만 그것도 몰라? 아빠 말이 맞아!” 하며 어김없이 K씨를 편든다. 녀석의 18번지인 “엄만 그것도 몰라?”가 혹 제어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까보아 K씨는 내심 걱정도 되었지만 녀석의 그 말은 한편으로 일방에게 조건 없는 ‘백기’를 요구함으로써 쌍방 공히 전력의 낭비를 막으면서 사태를 조기에 수습하는 조정자로서의 기능을 하기도 한다는 긍정적 측면에서 단호히 사용을 제지당하지는 않고 있었다. 아울러 녀석은 적어도 이순신의 호를 ‘불멸의’로 알고 있는 중1짜리 제 형 놈과는 뭔가 다를 것이라는 은근한 기대와 함께 어떤 상황에서도, 또한 누가 뭐라 해도 막내 놈만은 제 아비 K씨를 이해해 줄 것 같은 소박한 믿음이 K씨 가슴에 솜사탕처럼 부풀고 있었다. 그런 K씨가 자신의 주변상황을 다시금 둘러보고, 그가 아는 모든 인간관계에 대해 ‘냉정의 유지’가 필요하다고 느끼게 된 것은 그리 오랜 후의 일이 아니었다. K씨에게 있어 ‘믿음’이란 것은 독립변수인 배신감 X의 크기와 비례식을 이루는 종속변수 Y에 불과할 뿐이라는 뒤늦은 현실인식이 그를 잠시 혼란과 슬픔에 빠뜨리고 만 것이다.

당직 귀가한 어느 날 오후, 집에서 막 잠을 보충하려던 K씨는 뜻밖의 반가운 손님을 맞았다. 막내 ‘남해’가 유치원서 여자친구를 데리고 온 것이다. “어? 아빠가 왜 집에 계시지?” 하던 녀석은 대답을 듣기도 전에 제 여자친구를 바삐 소개했다. “아빠! 제 친구 ‘니우 썬’이에요!” “오! ‘New Sun’이라.... 새로운 태양이란 말이지... 멋있는 별명인걸!... 그래, 이름은 뭐니?” “아휴, 아빠는.... 얘 이름이 ‘니우 써니’라니까요!” 녀석은 ‘니우’를 강조하기 위해 입을 오리주둥이처럼 한껏 내밀며 얼굴 전체를 씰룩거렸다. 그 바람에 ‘선희’인 듯한 이름마저 ‘된발음’으로 나오는 것 같아 보였다. “니우라...., 혹시 ‘류’라고 말하고 싶은 거니?” 녀석들은 깔깔대며 좋아했다. 마치 K씨가 어릴 적 장독 뒤에 숨은걸 짐짓 모르는 체 “어디 숨었을까?”하며 주변만 두리번거리던 어머니를 놀려대며 재미있어 하던 풍경 하나가 기억 속에 떠올려졌다. 허나, 천진한 녀석들과의 이 놀이를 그냥 놀이로써만 즐길 수 없는 이 안타까움을 K씨의 팔자요 숙명 탓으로 돌려야 할까?
K씨는 깊은 땅 속에서 겨울잠을 자던 뱀 한 마리가 잠을 깨고 스르렁 똬리를 풀고 있는 것이 가슴으로 느껴졌다. “누가 이 어린 것들의 혀를 이토록 꼬이게 만들었단 말인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K씨는 묻어두었던 분노가 갑자기 치솟는 것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말했다. “근데, 얘들아! 앞으론 ‘류선희’가 아니고 ‘유선희’라고 불러야 한단다. 그래야 올바른 거야! 알겠니?” 순간 녀석이 눈꼬리를 치켜 올리며 소리쳤다. “아니에요! 아빤 그것도 몰라요? ‘유’가 아니라 ‘니우!’ ‘니우’라니까요... 따라 해보세요, ‘니우’라고!” “............................................” K씨는 말 대신 아들 녀석의 얼굴에 초점 없는 눈을 한동안 고정시켰다. 멍한 시야가 반투명의 스크린이 되어 아주 오래 전 읽었던 영웅전 속 대목 하나를 영상으로 띄우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시이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부루터스가 그의 몸에서 떨어진 직후의.... 시이저가 숨이 끊어지기 직전 이렇게 말했다던가? 아들과도 같았던 ‘부루터스’의 마지막 칼끝이 자신의 가슴을 파고들 때, “부루터스, 너마저!...”라고...

K씨의 그토록 믿었던 막내 녀석의 혀끝은 K씨의 가슴을 그렇게 파고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