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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자신을 향한 신화가 있다. 다른이들은 죽더라도 자신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 같은
이 신화성은 역경을 감내하게 하는 원동력도 되고,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긍정적 암시를 통해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게도 만든다. 내게도 어느 시절보다 강렬하게 나를 사로잡던 자기 신화의 시대가 있었다.
바로 20대 초반, 입대를 앞둔 무렵이 그때였다.육군 입영통지서를 받은 나는 무작정 해병대를
지원했다. 나는 군대에 관해 벌써 한 차례 아픔을 겪었다. 6·3사태 참가로 가고
싶었던 육사에 진학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왕 군대를 갈 바에는 제대로 복무해야겠다는
투지가 되살아나 형님과 아버님의 만류를 무릅쓰고 해병대를 고집했던 것이다.
당시는 군영 (軍營)문화와 여건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열악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입대는 피하고 싶은 십자가였다. 그런 시절 고집스레 해병대를 가겠다고
했으니 주변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해병대 지원은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입영통지서를 받고 난 뒤에는 지원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그해 5월 육군으로 입대했다. 나는 군 문제로 아버님께 두 번 불효를 했다. 해병대
지원으로 부친의 속을 적지 않게 끓였는데 자대 배치를 받고 1년이 되지 않아 베트남 파병을 지원한
것이 바로 두번째 불효다. 군 생활을 할 바에는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무언의 고집을
뻗치게 했다.
이번에는 아예 형님과 둘이서만 일을 벌였다. 처음에는 형님도 만류했지만
내 의지가 워낙 확고한 터라 아버님께 비밀로 할테니 베트남에 도착한 후 편지를 올리라고 충고해줬다.
그런 우여곡절을 겪고 1969년 9월부터 1년간 베트남 나트랑에 주둔한 100군수지원사령부에서
복무했다. 베트남에서 서너 차례 아버님의 편지를 받았다. 평소 과묵하신 아버님께서 그렇게 절절한
편지를 써 보내실 줄은 몰랐다.
 당시
어머님이 돌아가신 지 채 3년이 안 된 때였는데 아들마저 전쟁터에 보낸 아버님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이국땅에서 그 편지를 읽으니 참으려 해도 절로 콧등이 시큰거리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귀국했을
때 아버님의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센 것을 보고 당신께 얼마나 불효했는지를 깨닫게 됐다. 사선을
수없이 넘나들던 그 기간 중 나를 지켜준 것은 아버님의 사랑과 정성이었다.
귀국해서 제대하던 71년까지 복무한 곳은 최전방 육군 청성부대였다.
나는 그곳에서 비로소 분단 조국의 처절한 상황을 전신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남북을 가로지른
철책선을 처음 봤을 때의 심정을 ‘한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고 기록했던 그날의 일기도 아직
생생하다. 지금도 눈에 선한 철원 벌판의 철책선, 부서진 월정리역의 기차 잔해, 그리고 폐허가
된 노동당사를 봤을 때는 분단된 조국의 신음이 들리는 듯했다.
제대 말년까지 나는 그곳에서 갓 입영한 병사들과 같이 생활했다.
최전방이라 선임병으로서 대우를 받을 만도 했지만, 그런 혜택을 누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후임병들과
같이 초병 근무를 하며 내실을 키웠고 공동 생활의 질서도 터득했다.
돌아보면 내 생애에 군 생활만큼 유익한 시절이 없었다. 분단된 조국의
철책선을 바라보며 나는 통일의 꿈을 처음으로 키웠다. 그리고 남북이 하나 되기 위해 어떤 그림을
그려나가야 할 지를 깨닫게 됐다. 깊은 밤 초병 근무를 서며 하나하나 그려나간 미래의 그림들은
30여 년이 지난 뒤 살아 있는 그림이 되어 남북 교류, 협력의 물꼬를 트는 초석이 됐다.
155마일 휴전선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야 하는 내 고향 강원도의
모습은 한마디로 멍에를 진 아픔의 땅이었다. 따라서 이 고장이 안고 있는 접경 지역 문제는 반드시
수면 위로 끌어내야 하는 과제임을 그때 이미 예감했다고 할 수 있다. 최북단 지역을 바라보며
비로소 내 삶의 한 지점을 만난 것 같았으니까. 그때는 내가 30여 년 뒤 이 고장을 책임질
수장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지만 단지 내 조국, 분단된 국가의 모습이 안타까워
어찌할 바를 몰랐던 순간이었다.
그로 인해 이 지역을 안보관광지대로 구상하기에 이르렀고, 뼈가 으스러지도록
훈련을 받던 오음리는 나로 하여금 파월 용사의 만남의 장을 구상하고 곡진(曲盡)하게 함으로써
한 세대 뒤 새로운 모습으로 나와 조우하게 됐다.
어느 때보다 자기 신화의 의지가 강했던 시절, 해병대와 베트남을 고집하며 주어진 내 몫의 삶과
정면으로 맞서고 싶었다. 죽음마저 나를 피해갈 것 같았던 젊은 날의 치기야말로 두 번의 불효를
하면서도 내 운명과 정면 승부를 걸고 싶었던 시절이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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