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비디오를 보면서 저렴한 비용으로 편하게 영화를 즐기는 방법도 있다. 그럼에도 굳이 우리가 영화관을
찾는 이유는 작은 화면으로는 도무지 감지할 수 없는 ‘그 어떤 맛’을 대형 스크린을 통하여 마음껏
체험하고자 하는 욕구 때문이다. 눈이 느끼는 시각적 깊이는 곧 감동의 깊이와 직결된다. DVD에
하루가 멀다하고 인치 수를 더해 가는 대형 TV가 등장해도 여전히 대형극장이 곳곳에 늘어나는 이유는,
정교하면서도 스펙터클하고 환상적이면서도 역동적인 화면이 주는 쾌감을 그대로 즐기고자 하는 고급 미각도
늘어나는 소이일 것이다.
<신밧드, 7대양의 전설>은 대형 스크린이 줄 수 있는 장쾌한 감동과 아름다움을 최대한
노출시키고 있는 판타지 어드벤쳐 에니매이션이다. 신화적 상상력과 트래디지털 기법이 만난 이 영화의
무기는 실사영화에서는 볼 수 없는 신비롭고 환상적인 비주얼 묘사에 있다.
해적인 신밧드는 불화의 여신 에리스의 농간으로 1000년 동안 12개
도시를 지켜준 ‘평화의 책’의 도적으로 오인받아 그를 찾아 모험을 길을 떠난다. 여기에 신밧드를
믿지 못하는, 신밧드의 어릴 때 친구이자 ‘평화의 책’의 수호 임무를 지닌 시라큐스의 왕자 프로테우스의
약혼녀인 마리나가 동승하여 갈등과 재미를 증폭시킨다.
아름답고, 모험적이며, 바다를 동경하는 낭만주의자 마리나는 신밧드에게 죽 잘 맞는 파트너일 수밖에
없다. 괜한 일에 열 받아가며 티격태격 싸우다 사랑에 이른다는 뻔한 러브스토리는 식상한 느낌을
주지만, 위험을 겪고 극복해 가면서 서로 믿고 진실을 찾아간다는 끝마무리 덕분인지 마냥 가볍지
만도 않다는 게 영화를 다 보고 난 소감이다.
아마도 신밧드와 마리나의 캐릭터가 지나치게 헐리우드화 된 때문인지 개인적으로
흥미를 느낀 인물은 불화의 여신 에리스이다. 그녀는 아킬레스의 어머니이기도 한 테티스 여신의
결혼식에 자기만이 초대되지 못한 데 분격한 나머지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 세 여신을 미(美)로써
경쟁하게 하고, 아프로디테의 손을 들어준 파리스의 조국 트로이를 멸망으로 이끈 바로 그 장본인이다.
리드미컬한 긴 머리에 관능적인 미소, 한편으로는 빨간 눈의 사악함을
드러내면서 적당히 고혹적이며 적당히 지적이며 적당히 사악한 이미지로 나타나는데, 만약 사악하기만
했다거나 불평만 삼는 캐릭터로 나왔다면 영화의 맛이나 에리스 자신에 대한 매력이 훨씬 줄어들었을
것 같다. 게다가 자유자재로 형태를 바꾸는, 연기처럼 흩어졌다가 구름처럼 다시 뭉치는, 공간의
제약을 모르고 자유롭게 부유하는 그녀의 신체는, 신화의 세계, 변덕스러운 악녀의 세계로 들어왔다는
느낌을 즐겁게 맛보게 한다.
이야기 굽이굽이마다 관객을 압도하는 거대하고 황홀한 풍경이 쉼 없이 눈을 즐겁게 해주지만, 그래도
가장 신비롭고 흥미로운 장면을 꼽으라면 ‘세이렌의 유혹’을 꼽고 싶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싸이렌(siren)이라는
단어의 어원이며, 트로이 전쟁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오딧세우스를 아름다운 노래로 유혹하기도
했던 그들은 여자의 얼굴에 새의 모습을 한 바다괴물이라 알려져 있으나 영화에서는 물방울 정령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난파선과 해골이 여기저기 걸려있는 음침한 듯 하면서도 신비로운 거대 암석들, 사실보다 더 사실
같은 푸른 파도의 일렁거림, 안개에 싸인 듯 환상적인 그 바다 속에서 몽환적인 여인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신밧드 신밧드” 졸린 듯이 나지막이 부르는 여성의 목소리로 시작하여 비슷한 선율이
연속되는 이 노래는 지극히 환각적이다. 여기에 물의 정령들이 끊임없이 튀어오르고 흩어져가면서
뱃사람을 현혹하는 장면 장면이 이어지면 어느새 관객들마저 황홀경에 빠지고 만다. 그래, 저 정도라면
사람이 자기를 잃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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