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부자가의 가훈이 많은 재산을 관리하는 상위목표에 해당된다고 보면 하위목표로서 가거십훈(家居十訓)과 육연(六然)이 전해지고 있다. 가훈이 철학이요 방향이라면 가거십훈과 육연은 행동지침이라 할 수 있다.

가거십훈은 사람의 도리를 명확하게 하라는 명인륜(明人倫), 부모님에 대한 효도를 일깨우는 사친효(事親孝),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가르친 애군충(愛君忠), 사회의 기본적 단위인 가장의 제가를 중요시한 의실가(宜室家), 형제간의 우애와 친우 사이의 신의를 강조한 우형제(友兄弟)와 신붕우(信朋友), 여색을 멀리하라는 원여색(遠女色), 술에 취함을 경계한 계성취(戒醒醉), 자급자족의 사회경제에 맞게 처신하라는 과농상(課農桑), 항상 책을 가까이 하라는 강경학(講經學)을 내용으로 하고 있고, 육연(六然)은 스스로 초연하게 처신함으로써 타인으로부터 권위를 잃지 말라는 자처초연(自處超然), 남을 대할 때는 부드럽고 온화하게 정을 나누어야 한다는 대인애연(對人靄然), 일이 없을 때는 맑은 마음으로 다음을 생각하라는 무사징연(無事澄然), 일을 할 때는 과감하게 최선을 다하라는 유사감연(有事敢然), 뜻을 세웠으면 깨끗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는 득의담연(得意淡然), 뜻을 잃어도 의연한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는 실의태연(失意泰然)으로서, 그 내용이 모두 수신제가(修身齊家)의 중요함을 가르친 것이다.

이와 같은 구체적 행동지침의 가거십훈과 육연은 어느 위치에 있든 모름지기 우리들의 사회생활에서 삶의 지침으로 삼아도 무방할 것 같으며, 더욱이 개혁의 깃발 아래 환골탈태를 원하고 있는 오늘날의 공무원 조직에 대한 신선한 청량제로서 견지해야할 자세로 생각된다.
경주 최부자가의 가훈, 가거십훈, 육연을 보면 별것 아니라는 생각도 들 것이지만 부자이면서 사회적 책임을 다 하였으며 오만(傲慢)을 버렸고 탐욕(貪慾)을 경계하였다는 점에서 가치를 찾아야 할 것이다.
조직에 있어 오만은 시기를 불러오고 질투를 부추기는 암적 요소이다. 왜냐하면 내 뜻에 맞지 않는 것은 모두가 위선이요, 비민주적인 것으로 돌려 버리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내가 아니면 안 된다” 는 것이다. 그러나 최부자가는 찾아오는 과객을 따뜻하게 맞아 주었고 그들의 의견을 겸허히 수용하였으며 거드름을 피우거나 자신에게 복종 할 것을 바라지 않았고 진솔(眞率)하게 성의를 다한 점에서 이를 알 수 있다.

탐욕은 모든 근심 걱정을 가져다주는 원인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하지 않는가? 항아리에 도를 넘어 물을 부어 본들 넘쳐버리고 다시 담을 수 없다. 학(鶴)의 위는 항상 20%는 비어 있어서 능히 100년을 살 수 있다고 한다. 산에 가면 이름 모를 여러 가지 나무에 열매들이 달려 있다. 성숙하면 누구에게나 좋은 먹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보다 내가 먼저 차지하자는 심보로 먹지도 못하는 열매를 따버리는 작태와 같이 탐욕은 공멸 뿐이다.
최부자가에서는 오만과 탐욕을 찾아볼 수 없다. “진사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말라”, “재산은 만석 이상 늘리지 말라”, “흉년에 땅을 사지 말라”,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는 가훈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흉년에 농경지를 사달라고 애걸하던 사람들에게 오히려 양곡을 준 일이라든가 전답을 팔려면 최부자가에 팔려고 했던 일, 그리고 부채를 탕감(蕩減)했던 일들은 오만과 탐욕을 벗어던진 좋은 실례라 할 것이다.

최부자가는 분배가 공정하고 식솔들을 동등하게 대접하였으며 곤궁한 서민들을 구휼하는 등 부의 사회적 환원에 인색하지 않은 점이 부를 유지하는 가장 큰 밑거름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친 후 대륙의 새로운 문화가 유입되면서 조선에서도 신분제도가 서서히 붕괴되어 가고 있었다. 납속당상(納粟堂上)이나 공명첩으로 신분상승이 난무하여 병역과 납세에서 제외되는 양반의 수가 증가되자 부족한 조세는 상민들의 고혈(膏血)로 채울 수밖에 없게 됨으로써 농촌은 공동화를 면치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국역을 피해 마을 전체가 야반도주(夜半逃走)가 많았던 사회적 상황은 협호(夾戶)를 양산하게 되었고 지주들은 더 많은 농경지를 확보할 수 있었지만 최부자가는 땅을 사지도, 협호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노비들에 대한 노동가의 분배도 다른 소작 상민들과 동등하게 하였으므로 신분상승을 할 수 있었던 자들도 스스로 노비로 남겠다는 자가 많았음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숭고한 인간애는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며느리들은 3년 간 무명옷을 입어라”, “사방 백리에 굶주리는 자를 없게 하라”는 가훈에서 인간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경주 최부자가의 300년 부의 유지는 오만과 탐욕을 버리고 사랑을 베풀었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마지막 부자인 최준의 활동 시기는 일제의 강점기로, 나라가 없는데 재산이 많아본들 그 가치는 없는 것과 같으므로 최준 공은 전 재산을 오늘날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대구 지역의 대학 창설에 헌납하였던 것이다.

아무쪼록 경주 최부자가의 가훈ㆍ가거십훈ㆍ육연에서 국가와 사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역학관계가 어떻게 정립되어야 하며 견지해야할 행정인의 행태는 어떤 것인지 생각되는 바 있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