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열을 내리려고 녹차를 마신다. 다음번 전화를 기대해 보자...
내게 걸려오는 전화가 이런 항의 전화만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내게 걸려오는 전화의 대부분은 정말로 나를 필요로 한다.
아직은 수줍은듯 군지원 방법을 물어보지만, 곧 씩씩한 국군이 될 현역입영대상자들, 가계가 어려워 친구들에게조차 말하기를 꺼리는 얘기도 나에게 서슴없이 늘어놓는 생계곤란 감면 신청자들, 자식을 보다 더 넓은 세상에서 공부하게 하려고 국외여행허가 서류를 물어보는 부모님들, 열악한 근무여건에 시달리면서도 산업현장에서 군소리 않고 일하는 산업기능요원들... 그외에도 너무 많다.

민원인들은 내가 알고 있는 병무지식의 아주 일부만을 알려주어도 내게 고맙다는 말을 서슴없이 해준다. 병무청 업무 종료 시간만 알려줘도 고맙다는 말을 빼먹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미안한 일인것 같다. 난 그들이 모르는 규정을 몇 개 더 안다고 그들앞에 교만을 떨고 있는 것 같다.

오늘 내가 150통 넘게 전화를 받았고, 그중 130통 넘게 고맙다는 말을 들었으니, 몇통 항의 전화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난 남는 장사를 한 셈이다.
얼마나 좋은 일인가.
이렇게 전화하는 사람들이 내게 고맙다고 하니까, 나 또한 가만히 있으면 안될 것 같다. 혹 내게 전화하는 사람들 말을 내가 잘못 알아듣고, 손을 다친 사람에게 발에 연고를 바르라고 하는 건 아닌지, 꼭 꼭 챙겨봐야 할것 같다.
내가 그네들에게 알고 있는 병무규정들을 친절하게 전부다 알려줄 수 있을까?
오늘 아침 한통의 항의 전화에도 여지없이 무너지는데...
親 切親 切親 切親 切親 切親 切親 親...
아침부터 계속 머릿속에 맴도는 말이다.
친절, 절친.
내가 왜 몰랐을까?
친절을 뒤집으면 절친이 된다는 사실을.
민원인이 나와 절친한 사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내 핸드폰에 걸려오는 전화중에 누가 내게 고맙단 말을 했던가.
내가 단지 민원인에게서 걸려오는 전화는 당연히 업무적으로만 받아야 된다고 생각한 데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고향에서 걸려오는 어머니 전화라면 업무적으로만 받겠는가, 사랑하는 아내전화, 동생전화, 남자친구 전화라고 한다면.
그들을 내가족처럼 생각한다면 열번이고, 스무번이고 그들 목소리 숨소리 하나에서라도 진심을 읽으려 하고, 문제가 생기면 팔걷어 부치고 해결해 주어야 할 것이다.
선배님들이 그렇게도 일러주신 말씀을 내가 이제서야 깨닫는 걸 보면, 나이를 헛먹은 건지, 아니면 내가 반박이(행동이 느린데서 생긴 별명)라서 그런가 보다.

벌써 올 한 해도 다가고 있다.
생각을 비우고, 민원인을 사랑하는 어머니, 아버지, 친동생처럼 절친한 사이로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오늘도 나에게 걸려올 전화를 조용히 기다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