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 얇은 편이다. 그렇다고 내가 귀가 얇아 다른 사람들 말에 이말 저말 말바꾸기를 잘한다는 건 아니다.
하루종일 걸려오는 민원인 전화에 귀를 귀울여야 하는 내 직업 특성상 귀가 얇아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귀가 얇아야 민원인 말에 쉽게 수긍하고, 그들의 요구사항을 되도록 빨리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말도 안되는 철학이 내가 여기 병무민원 상담소에 근무하고 난 뒤부터 생겨난 철학이다.

어제는 우리 전 직원이 친절 교육을 받았다.
親切 親切 親切 親切 親切
아침 출근길에 어제 배운 친절을 다시 한번 되뇌어 본다.
오늘 아침은 왠지 민원인에게 내가 한없이 친절해 질 것 같다.

병무청 홈페이지 등 밤새 바뀐 규정은 없는 지 다시 한번 살펴보고, 특히 취약 부분인 국외여행허가 부분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제 배운 친절로 다시 한번 몸단장 하고 오늘 나를 필요로 할 첫 민원인을 기다려 본다.

8시 59분
첫정. 첫사랑. 첫 키스... 긴장되는 순간이다.
첫눈. 첫 손님. 첫 전화. 그리고 첫 마디.
“감사합니다. 병무민원상담소 문정은 입니다.”
“저 지난번에 동원 훈련 안나간 사람인데요.”
내 눈은 벌써 컴퓨터 병적화면에 ‘동원훈련 불응자’를 응시하고 있다. (에고, 아침부터 딱 걸렸네. 이런 생각 하면 안되지.)
그리고 벌써 내 입은 동원훈련 불참시 고발조치가 되고, 벌금이 부과된다고 복창하고 있다.
“현역복무 잘 하고 이제 막 일을 시작했어요. 근데 어떻게 먹고 살라고 훈련 한번 불참한 사람한테 벌금까지 내라고 할 수 있어요?
맞는 말같다. 그러나 동원 훈련은 일반예비군 훈련이 아니고, 국가 비상시를 대비한 훈련이라서 연기신청을 미리하지 않고 무단불참을 하면 바로 고발조치가 됨을 설명해 준다.
“우리들 벌금 받아서 월급 만들어요?”
역시나 되받아 오는 민원인의 말은 만만치가 않다.
어제 친절교육때 그렇게 열심히 듣고, 각오한 나의 친절 결심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나는 다시 한번 민원인을 설득하려 하지만, 이미 내 모습도 흥분된 것 같다. 그러고도 한참이나 실랑이를 벌이고서야 전화를 끊는다.
전화를 끊고난 내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