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에 있는 기간이 길면 길수록
입대 전 해내지 못했던 많은 일들을
다 해낼 것 같은 기분이었다

“군대 와서 달라진 게 뭐예요?”
군 생활 하면서 정말 많이 듣게 되는 질문이다. 내게는 남들이 흔히 얘기하는 거창하고 추상적인 대답말고 아주 작지만 구체적인 대답이 있다.
“워드를 다섯 손가락으로 칠 수 있게 되었고요, 한 달에 두 세 권 정도의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참 별것 아닌 얘기 같지만 내게는 정말 엄청난 변화이다.

입대 전에는 십 년을 노력했었다. 자판을 보지 않고 다섯 손가락으로 워드를 쳐보겠다고…….
대학, 대학원 과정을 거치면서도 독수리 타법이었던 나는 친구의 손을 빌릴 수밖에 없었던 경우가 많았다. 많은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급하고 동적인 성격의 나는 컴퓨터 앞에 앉는 것조차 좋아하질 않았기에 다섯 손가락으로 워드 치기란 그야말로 ‘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군대 온 지 8개월 만에 꿈이 이루어졌다. 이등병 고참 행정병들에게 나이 서른이 되도록 워드 하나 못친다고 무시당한 것이 어찌나 가슴에 사무치던지. 그 후로 나는 시간 날 때마다 워드연습에 매달렸다. 다만 컴퓨터를 사용해서 업무를 보아야 하는 행정병이 아니었기에 고참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일과 후와 주말 시간을 요령껏 이용했다. 눈물 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기미가 보이지 않던 다섯손가락으로 워드 치기의 완성은 위문열차와 라디오 프로그램 대본 정리 작업을 하던 중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졌다.

꿈이 이루어지던 날 어찌나 기쁘던지 국군방송 건물 옥상에서 크게 소리 지르다가 마침 지나가던 PD에게 엉뚱한 위로를 받기도 했다.
“위문열차 하랴, 라디오 진행하랴 많이 힘들지? 조금만 참아. 시간 금방 간다.”
그게 아니라 워드 다섯 손가락으로 칠 수 있게 된 게 기뻐서 그렇다고 설명하기도 그래서 그냥 “예.”하고 대답했지만 속마음은 오히려 군대에 있는 기간이 길면 길수록 입대 전 해내지 못 했던 많은 일들을 다 해낼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지금도 나의 워드 치는 속도는 그리 빠른 편은 아니다. 하지만 펜으로 쓰는 것보다는 훨씬 빠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줄 한 줄 글을 써내려 갈 때마다 힘겨운 독수리타법으로 일관했던 암울했던 과거를 즐거운 추억으로 떠올릴 수 있어 기쁘다. 각기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 다섯 손가락들이 얼마나 기특한지 모른다. 주인 잘못 만나 그 동안 심하게 고생했던 양쪽 검지손가락들에게도 이젠 체면이 선다.

내가 책을 무척 많이 읽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말씀을 해 주시는 분들을 만나면 정말 부끄럽다. 방송 생활8년 동안 내가 읽은 책의 수는 창피하지만 스무 권을 넘지 않는다. 바쁘다는 핑계,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 손쉽게 볼 수 있는 비디오와 영화의 풍성한 보급 등이 원인이었다. 그래도 학창시절엔 나름대로 좋은 책들을 만날 때마다 느끼는 가슴 벅차오름을 즐기고 까다로운 작가의 작품을 읽고 나서는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밤새도록 고민하는 문학청년이었는데…….
문학이 좋아서 불문과를 갔고 대학에서도 어학보다는 문학에 더 흥미를 느껴 불시, 불문학 수업만큼은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했었는데……. 언제부턴가 책과는 담을 쌓고 지내게 되었고 그렇게 생활을 하면서도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못하는 메마른 삶을 살아왔다. 다만 그런 와중에도 다시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은 갖고 있었던 건지 선물받은 한 권의 소설을 계기로 책과 다시 친숙해진 지 불과 세 달 만에 놀랍게도 내가 지난 8년간 읽었던 책의 양을 넘겨버린 것이다.
평일 일과 후 자유시간과 주말을 이용하면 한 달에 스무 권도 이제 문제가 아니다. 책의 매력에 다시 빠진 것이다. 어느 철학자가 ‘좋은 책을 읽는 것은 옛 성현들과 대화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어디 성현들 뿐이겠는가. 세계적인 재벌과도, 시골에서 묵묵히 밭을 일구며 살아가는 농부와도, 풍부한 상상력을 지닌 주부와도 대화할 수 있는 길은 바로 독서인 것이다.
더욱이 2년여 간 한 울타리 안에서 지낼 수밖에 없는 군인들이 그 벽을 넘어 세상 어느 곳, 어느 시대, 어떤 사람을 막론하고 자유롭게 대화하고 여행할 수 있는 길은 독서만한 것이 없을 것 같다. 나는 어제도 위문공연을 마치고 내무반으로 돌아와 작가 최순우와 함께 ‘한국의 미’에 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군대에서 얻은 좋은 습관 덕에 나는 지금 ‘다섯 손가락’으로 ‘책’을 쓰고 있다.
<서경석, 병영일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