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과객(過客)을 후하게 대접하라는 것이다.
과객이란 자신의 집을 찾는 손님이다. 물론 친척도 포함된다. 자신의 집을 찾는 손님은 신분의 고하나 재산의 과다를 따지지 않고 가능한 한 후한 대접을 하는 것이 사민평등의 이치이다. 이를 최부자가에서는 가훈으로 정립하여 철저하게 시행하였으므로 언제나 수많은 과객이 들끓었고 그들에게 극진히 대접함은 물론 떠날 때는 거마비까지 마련하여 주었다는 것은 사민평등의 이치를 충실하게 이행한 것이다.

넷째, 흉년에 땅을 사지 말라는 것이다.
조선의 빈민구제 제도이면서 세입제도인 환곡(還穀)을 악용하는 사례가 아전들을 중심으로 극심하게 횡행하여 농촌의 공동화(空洞化)를 초래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조세수입 마저 감소시키고 병역과 연계되어 병영(兵營)에 병력이 없는 한심한 경지에 이르게 하였던 경우가 있었는데, 흉년이 되면 이러한 현상이 가중되어 부의 편재현상이 더욱 두드러질 수밖에 없으므로 부자로서는 쉽게 재산을 늘릴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었으나 최부자가는 땅을 사달라고 해도 사양함으로써 국민이 곧 하늘이요, 소작인이 곧 자신의 재산을 유지케 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알고 더불어 사는 대의를 실천하였던 것이다.

다섯째, 며느리들이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으라는 것이다.
당시의 무명은 사회 전반에 걸쳐 화폐의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교환의 중요한 매개물이었고 가치의 척도로 명실공히 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무명 1필(疋)은 쌀 12두와 교환이 되었던 것으로 보아 일반 국민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재화였다 할 것이다. 이러한 무명보다 가격이 더 비싼 옷감으로 비단이 있었다. 부자는 무명옷보다 비단옷을 입었던 것 같다. “솔선수범은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니라, 그것은 유일한 방법이다” 라고 한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박사의 말이 있듯이 최부자가에 시집온 며느리들에게 비단옷 대신 3년 동안 무명옷을 입도록 근검절약의 생활화를 솔선수범함으로써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정신을 보인 것이다.

여섯째, 사방 백리 안에 아사자(餓死者)를 없게 하라는 것이다.
가난의 구제는 나라도 불가능하다. 아무리 부자라 해도  조선의 800만 백성(당시 추정 인구)들을 굶주림에서 구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거주지를 기준으로 사방 백리 안에 아사자를 없게 하라는 것은 가능한 한 많이 베풀라는 것으로 이해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시공(時空)이 사회이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로서 너와 나의 상호작용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를 떠난  인간은 살아갈 수 없다. 로빈슨 크루소는 난파선에서 사회의 산물 때문에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조건을 인간에 바탕을 두고, 인간을 사랑하라는 최부자가의 가훈은 망각하기 쉬운 인간애를 일깨워줄 뿐 아니라 그 실천에 중점을 두었던 것이다. 찾아오는 과객의 수를 잘못 예측하여 며느리들이 끼니를 넘기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은 이를 증명하는 것이며,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주위의 많은 부자가들은 큰 화를 입었지만 최부자가 만은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