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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고양 경계에 있는 행주산성에 들어서면 엄청나게 큰 권율 장군의 동상을 볼 수 있다. 장군은 임진란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공로로 이순신·원균과 함께 1등 선무공신에 책봉되었으며, 행주대첩의 승전으로 도원수에 임명되었다. 행주대첩은 얼마나 중요한 전투였으며, 우리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4백 년 전으로 역사의 초침을 돌려본다.
임진란 이듬해인 1593년 2월, 이 무렵 왜적의 주류는 서울에 몰려와 있었다. 패전을 몰랐던 고니시의 제1대가 평양에서 명의 이여송에게 패해 쫓겨온 것이 바로 지난 1월이었다. 가까스로 벽제관(碧蹄館)에서 명군을 대패시켜 숨통을 트긴 했으나 더 이상 싸울 여력은 거의 없는 상태였다. 명군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벽제관(碧蹄館)에서 패한 이여송은 후퇴하면서 ‘서울 주변의 조선군은 임진강 이북으로 후퇴하라, 그렇지 않으면 적의 밥이 될 것이다.'라고 경고할 정도였다.
그러나 조선군은 달랐다. 물러서기는 커녕 성밖 20리 거리에 있는 조그만 언덕에 산성을 구축하여 서울 탈환을 노리고 있었다. 그 대장이 멀리서 승승장구하며 올라온 전라 감사 권율이었다. 그는 작년 7월 전라도 이치에서 적을 물리친 후 광주목사·나주목사에 이어 전라감사가 되었는데, 이 무렵 서울의 왜적을 치기 위해 올라와 있었다. 권율은 조방장 조경과 함께 2천 3백 명을 거느리고 행주산성에 웅거했다.
조경은 40세가 넘어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은 높지 못했고 나이도 이미 50세가 넘었다. 조경은 임란 초, 적을 맞으러 경상도로 내려가다가 적진 속에서 중상을 입고 겨우 살아났다. 그 후 수원부사로 발탁되었는데 권율이 이번에 그를 전라 방어사로 삼았다. 왜적은 눈의 가시 같은 이 코앞의 산성을 없애버리기로 했다. 더구나 권율에게는 지난 이치전투에서의 원한도 있었다.
2월 12일 새벽, 서울에 있는 3만여 명의 적이 모두 출전해 산성 앞 들판에 집결해 있었다. 한편 조선군으로서도 행주싸움은 처음부터 계획된 전투는 아니었다. 다만 겁주려는 의도가 농후했다. 행주산성같이 들판에 고립된 야산에서 대적을 맞아 싸운다는 것은 백전백패다. 왜적이 산성을 친다고 하자 도원수가 있는 파주로 탈출하려고 성을 나섰으나 길이 막혀 하는 수 없이 도로 들어가 싸운 전투였다. 명군이 평양으로 물러간 후 우리마저 물러서면 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결사적으로 적과 싸웠다.
성안에는 전라 소모사 변이중이 만든 ‘화차'가 300량이나 있었다. 이는 한 화차에 총구 40개를 장치하여 쏠 수 있는 그야말로 세계 최초의 연발총이었다. 그리고 요즘으로 말하면 수류탄 같은 “질려포”도 많이 준비해놓았다. 권율은 또 수차를 돌리듯이 돌을 쏘아대는 ‘수차석포'도 마련해놓았다. 성책도 내외 이중으로 만들어 적의 인해전술에 대비했다. 병사들은 젖은 수건과 함께 ‘재 넣는 주머니'도 차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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