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눈물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보충대 귀퉁이 한 쪽에서 누가 볼 새라 황급히 눈가를 훔쳐내던 아버지의 모습은 또 다른 기쁨이었다. 모친, 그러니까 할머니가 마지막 숨을 놓았을 때도 볼 수 없었던 그 눈물을 훔쳐본 것은 행운이었다.
입대함으로써 아버지에게 조금이나마 고통을 안겨줄 수 있을 것이라는 치졸한 믿음이 희열을 안겨줬던 것이다. 

“탄알 일발 장전! 안전핀 확인!”
어둠이 막 가라앉기 시작하던 1987년 12월 어느 날.
당시 서부전선은 ‘김일성 사망설'과 대통령 선거, 그리고 88서울올림픽을 불과 9개월여 앞두고 숨조차 내쉬기 어려울 정도로 긴장감이 팽배해 있었다. 특히 ‘6월항쟁'과 ‘6·29선언'으로 인해 촉발된 국민의 분노 또한 언제 다시 폭발할지 모를 휴화산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때문에 흔히들 ‘155마일'이라고 부르는 휴전선은 작은 새의 날개짓 하나에도 비상이 걸리고, 수시로 비무장지대 수색, 매복 명령이 내려질 정도로 긴박한 하루하루가 이어지고 있었다.
더욱이 이러한 긴장감과 풀잎 마주치는 소리에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비무장지대에 대한 두려움은 입대 4개월차, 갓 부대 전입을 마친 신병에게 있어서는 매서운 한파보다 더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통문 개방!”
“첨병조, 전방 시야 확보!”
팀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영원히 닫혀 있을 것만 같던 통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남북간 교류확대로 금강산 육로관광이 실현되고, 경원선 철도 복구공사가 한창이어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만, 당시 신병이 알고 있는 통문은 프랑스 바스티유 감옥이나 악명 높은 미국의 알카트레즈감옥의 철문만큼이나 단단히 채워져 있어야 했다.
그런데 비무장지대를 출입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통문이 소리 죽여 열리고 있는 것이다. 때맞춰 통문과 연결돼 있는 철조망과 그 사이사이 매달려 있던 ‘깡통'들이 아우성친다. 그러자 비무장지대의 어둠이 확 달려들었다. 그새 느물느물 게을러하던 해가 완전히 서산을 넘어버린 것이다.

앞서 가는 첨병조의 모습이 어둠에 묻혀 형체만 아른거린다. 한발한발 내딛는 모습이 무척이나 힘겨워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소총과 실탄·수류탄·크레모아·‘M60'이라는 자동화기 실탄 등 몸에 걸치고 메고, 허리에 두른 장비만 해도 대략 30㎏ 정도. 게다가 내의와 ‘오리털' 방한복, 위장복, 방한화까지 갖추니 실질적인 중량은 몸무게까지 합쳐 100㎏이 넘었다.

때론 서치라이트 불빛을 피해 고랑을 타고 지나기도 하고, 혹 적이 설치해 놓았을지도 모를 부비트랩을 살피느라 지체된 걸음을 재촉하길 2시간여. 첨병조의 신호가 떨어졌다. 마침내 매복지점에 도착한 것이다. 그런데 매복장소라는 곳이 허허 발판에 고랑 하나 달랑 있는 곳이 아닌가. 도시 한복판에서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몸으로 활보하는 꼴이다.

고랑에 등을 기대고 누우니 북측 초소에서 발산되는 불빛이 바로 손앞에서 잡힐 것만 같다. 특히 귀퉁이 한쪽이 푹 파인 ‘손톱달'은 아버지의 그것과 너무도 닮았다.

그 순간 아버지를 떠올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해군 수병으로 군복무를 마친 아버지. 평소 술버릇처럼 되뇌던 당신의 군에 대한 기억은 ‘다시는 잇고 싶지 않은 필름의 한 조각'과도 같았다. 그가 듬성듬성 풀어놓은 필름 조각들을 대충 이어보면 ‘구타와 욕설, 그리고 배고픔'. 그러나 아버지의 ‘군대관'은 뚜렷했다.
“남자라면 당연히 군대를 다녀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