는 형성도 어렵지만 수성은 더 어렵다. 중세 서구의 문예부흥(renaissance)은 당시 금융업과 무역업으로 거부가 된 메디치가(家)의 업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메디치가의 부는 200년이 지속되었음에 비하여 조선의 경주 최부자가는 만석꾼의 부를 300년(17세손 최진립 - 28세손 최준)이나 유지하였으니 이는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운명론적인 비아냥도 있을 수 있지만 오늘날 대기업이 30년 이상을 버티는 경우가 극소수라는 점과 비교해 보면 이에는 우리들이 배워야할 노하우(know how)와 교훈이 있을 것이다.

만석꾼이 어느 정도의 부자인지를 알아보자. 오늘날에는 200평의 논에서 4석의 벼가 산출되고 이를 도정하면 2석의 쌀이 나온다고 볼 수 있으나 조선시대에는 생산량이 적었으므로 200평 당 1.5석의 벼가 생산되고 이를 도정하면 약 7두 정도의 쌀이 나온다고 계산하면 어림잡아 만석의 벼에서는 4천 석의 쌀이 산출될 것이다. 그러나 많은 농경지를 직농(直農)할 수 없어 전체를 소작시키고 소작료로 받은 것이 만석일 경우에 만석꾼으로 통용되었으므로 만석꾼의 농경지는 약 300여만 평이 된다는 계산이 나오며, 4,000석의 쌀을 오늘날의 화폐가치로 환산해보면 4,000석×10두×10되×4,000원=16억원이 된다. 또한, 미곡 생산 외 잠업이나 목화 등 특용작물의 재배 등이 있으므로 이러한 것까지 합한다면 경주 최부자가의 연간 총수입액의 계측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부의 유지와 관리가 300여 년의 긴 세월 동안 시대적인 특수상황의 위험 속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지속되어 온 것은 경외(敬畏)의 도를 넘어서는 것이 아닐까? 경주 최부자가에는 대대로 육가훈(六家訓), 가거십훈(家居十訓), 육연(六然)이 전해오고 있는데 이를 살펴봄으로써 거대한 부의 유지와 관리의 비밀을 어느 정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먼저 가훈의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 과거는 보되 관직에는 나가지 말고 진사 정도의 자격만 가지라는 것이다.

조선은 신분에 따라 직업이 달랐고 혼례까지 끼리끼리였다. 그러므로 양반의 신분이 아니면 재산의 형성은 물론 그 유지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양반이 되어야 하고, 성리학의 명분론이 사회적 질서유지의 틀이었기 때문에 과거를 통하여 관로에 진출하지 않으면 부자의 꿈은 접어야했던 시대였다. 물론 신분의 벽을 넘어 상업을 통한 부자도 있었지만 그 부의 유지는 단기간에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최부자가에서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기 위하여 과거는 보되 관로에 나가지 않았고, 대과의 자격시험인 소과에만 응시하여 진사나 생원이 되어 양반으로서의 신분을 유지하였던 것이다.

둘째, 재산은 만석 이상 늘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재산은 다다익선(多多益善)이 아닌가? 더 많은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음에도 만석을 기준하여 이에 만족하라는 가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당시 농업은 상민과 노비가 감당(勘當)하였으며, 양반은 오로지 학문에만 몰두하여 과거를 보아 관직을 얻는 것이 최고의 가치로 작용하였다. 고위 관료가 되면 부의 축적도 용이한 일이며, 부가 편재되면 국가에 대한 소외계층이 많아지는 것은 당연지사로서, 같은 신분의 양반이라도 상호간 시기(猜忌)와 질투(嫉妬)가 일어날 것이며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지 않은가? 관직에 연연하지 않고 일정한 수준의 재산 이상을 치부하지 않음으로써 재산으로 불거질 불행을 사전에 예방하려는 현명한 처사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