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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8년 12월 15일(이하 날짜는 양력) 밤 12시경 겨울바람이 살을 에는 남해도 노량에서 왜군과 최후의 일전을 벌이기 직전에 그는 함상에서 손을 씻고 무릎을 꿇어 향불을 피웠다. 장군은 천지신명께 마지막 제를 올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원수를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此獸若除 死卽無憾)”
그는 이미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밤새 싸우다 아침해가 떠오를 무렵 왜군의 총에 맞아 돌아가시면서도 장군은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戰方急 愼勿言我死)”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1592년 5월 23일 일본군 선봉이 부산포에 도착하여 임진왜란 7년전쟁은 시작된다. 5월 24일에 부산진성이 함락되고 정발 장군이 전사하였으며, 5월 25일에는 동래성이 함락되고 송상현 부사가 전사한다. 6월 7일에는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결사 항전하던 신립 부대마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일본군 제1군에 의해 궤멸되고 만다. 이처럼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북상하고 조선 육군이 고전하고 있을 때 남쪽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합포, 적진포, 사천, 당포, 당항포 등지에서 연전연승하면서, 육지의 적이 병참선을 위협받는 상황이 되었다.
곽재우, 김천일, 고경명, 정문부 등의 의병부대가 각처에서 일어나고 명나라 원군이 도착하자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한다. 임진왜란이 조선의 승리로 끝나게 된 것은 이순신 장군이 해전에서 승리하여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전진을 막은 것이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육지에서 뿐만 아니라 바다에서도 이순신을 도와 끈질기게 항쟁한 이 땅의 이름 없는 의병들의 활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남 통영시 산양읍 영운리 속칭 삼칭이 마을에는 ‘돛단여' 또는 ‘괘범도'라 불리는 간출여가 하나 있다. 통영의 마리나리조트에서 산양 일주로를 따라 약 10분 정도 달리면 나오는 영운리에는 일운마을과 이운마을이 있는데 이운마을에서 바닷가로 내려가면 선착장과 포구가 나온다. 여기서 포구 오른쪽 끝의 해안을 끼고 돌아 약 15분 정도 걸어가면 돛단여가 우뚝 서있다. ‘여'라고 하면 암초를 말하며 물 밑에 있는 것은 수중여이고 물 위로 솟아있는 암초는 간출여라고 한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쉼 없이 구르고 있지만 민중의 함성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는 것을 이 평범한 바위 덩어리가 일러주고 있다. 임진왜란이 났을 때 이 고장의 장삼이사들이 창의하여 격문을 돌리고 낫과 괭이 등 농기구를 들고 왜군과 항전했다. 그들 중 일부는 이 돛단여에 올라 돛을 달아 위세를 올리고 군함처럼 보이게 하여 왜군을 기만했던 것이다. 수많은 의병들과 이를 지휘하는 탁연 장군의 숨결이 서려있는 바위섬이다. 당시 탁연 장군의 의병부대는 현재의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 뒷산인 장군봉에다 목책을 치고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으며 밤에는 불을 밝혀 수군을 응원했다는 이야기가 이 고장에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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