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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후... 자기 가계에서는 더 이상 미래를 기대할 수 없게 된 코로는 동네 장남들을 모아 부족장 교육을 시킨다. 영화의 축이자 갈등은 바로 여기에서 생긴다. 할아버지로서는 손녀 파이(파이키아)를 애틋하게 사랑하는 코로이지만, 전통을 지켜나가는 부족장의 입장이 되면 전혀 그녀를 용납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눈치없이 지도자를 꿈꾸는 파이를 불경스러운 일이라고 나무란다. 하지만 이미 지도자로서 신비한 힘과 용기를 지닌 소녀 파이는 아픈 마음을 달래며 어깨너머로 하나하나 지도자의 자질을 배워가는데...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아무래도 파이가 고래 등에 올라타서 바다로 빠져들어가는 장면일 것이다. 죽어도 상관없다며 거대한 고래 등을 타고 깊고 푸른 바다로 들어가는 장면은 아프고 아름다우며 장엄하고 신비롭다. 고래 등에 올라탄, 그야말로 <고래를 타는 사람>이 된 파이가 고래와 하나가 되어 신화의 중심에 서는 장면이 아닌가. 아마도 이 영화가 각종 영화제에서 관객상을 수상한 이유는 주인공 소녀가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 페미니즘 성격을 지니면서도 전투적이기 보다는 따뜻한 사랑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인 듯 하다. <너의 끈질김에는 지친다.>며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는 할아버지를 끝까지 사랑하는 파이, 이미 그녀는 태생적으로 핏줄 가득히 지도자의 자질을 갖고 태어난 것이다. 여자라고 왜 안된단 말인가.
이 영화를 보니 우리의 선덕여왕(신라27대, 재위 632-647)이 생각난다. 반만 년 역사 속에 우리에게는 세 명의 여왕이 있었다. 물론 그들은 모두 신라의 군주였고, 그 중 첫번째 여왕이 바로 선덕이다. 우리 나라의 파이키아인 셈이다.
선덕은 그러나 파이키아와는 달리 아버지 진평왕의 전폭적인 지지아래 여왕에 등극한다. 그녀는 덕만공주시절 중국에서 보내온 병풍 속에 그려진 모란꽃을 보고 향기가 없을 것이라고 예측한 총명하고 영민한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그녀를 여왕으로 강력하게 밀어주는데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싶다. 또 그 당시 신라가 여왕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유교국가였던 조선과는 달리 조금은 유연했던 사회분위기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진평왕 15년, 즉 선덕 여왕이 왕위에 오르기 40년 전인 593년에 일본에서는 최초의 여성 천황인 스이코 천왕이 등극했는데, 진평왕은 여기에서 자기 딸을 여왕으로 삼는 힌트를 얻었을지도 모르며, 또 신라에는 부계 가계내에서 성골 신분이 왕위를 계승해나가는 골품제도가 있어 비록 한 대에 한해서이긴 하나 여성에게도 가계 혈통을 이어나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져있기도 했다. 그 당시 성골남자가 다했기 때문에 여왕이 즉위했다고 하는데, 어쨌든 유사이래 없었던 일이었으므로 그 과정이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진평왕은 혹시 모를 반란에 대비하여 선덕의 협조자가 될만한 사람들을 골라 높은 자리에 등용하고, 여왕의 왕위 계승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제거해 나간다. 이렇게까지 굳이 딸을 여왕으로 만들려했던 까닭은 딸을 사랑하는 마음이 커서일테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왕실의 순수한 혈통을 유지하고픈 욕심도 강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선덕도 선덕이지만 진평왕도 대단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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