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기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난 한번도 ‘여름휴가’ 를 떠나본 적이 없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오픈카를 타고 바람결에 머리카락을 날리며 손을 머리 위로 힘껏 흔들어보고 싶은 환상도 있으나, 교통체증, 비싼 물가 등등 현실적 장벽에 부딪히고는 ‘선풍기 앞에서 수박 먹는게 최고’란 식으로 합리화하며 해를 보낸 것이 벌써 30년째다. 말로는 남들 다 휴가 다녀온 후에 휴가간다며 느즈막히 휴가일정을 잡아보지만 결국 다녀온 곳은 언제나 머무는 그곳, 외국같지 않은 외국 ‘방콕’ 이다.

여태껏 해오던 생각과 관습들이 변한 것은 아니나 올해는 이상하게도 정말 휴가철에 휴가일정을 잡게되었다. 휴가라기 보다는 ‘또다른 노동, 육아’ 를 충실히 이행해야할 절실한 필요를 느껴 아이와 함께 집에 있고자 했을 뿐인데 8개월 된 아들놈은 벌써부터 뭘 안다고 나가는 걸 어찌나 좋아라 하는지...집에 있는걸 싫어라 해서 바람쐬러 나가게 되었다. 목적지는 연꽃이 만개하기로 유명한 부여 궁남지.

처음에는 날도 덥고 몸도 힘든데 애를 안고 다녀야 한다는 생각에 번거롭기도 했으나, 부여로 통하는 길을 달리며 회사와 집이라는 고정된 루트를 벗어난다는 것 자체가 내 삶에 오랜만의 설렘을 가져다준다는걸 알게 되었다.

1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부여 궁남지. 갓 10시를 넘긴 이른 시간인데도 주차장에는 버스, 자가용이 한 가득이다. 나는 아주 가끔씩 둘러보는 바깥 세상인데 다른 사람들에겐 너무나도 익숙해 보이는 이 세상이다. 어쩜 그리도 사람들은 잘 알고 잘 찾아다니는지, 나만 세상을 모르고 사는 것 같아 조금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함께나온 친정부모님은 작년에 이은 연속방문임에도 불구하고 한껏 상기되신 표정이다. ‘올해는 얼마나 더 폈나~ 비가 심하게 왔는데 괜찮으려나~’ 하시며 앞서 나가신다.

아들내미는 뭣도 모르면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 주위를 둘러본다. 알아듣던 말던간에 난 ‘특유의 엄마 말투’로 아들내미에게 좋은 엄마 역할하기를 청했다. ‘특유의 엄마 말투’ 란 굳이 정의를 내리자면.. 목소리를 곱게 다듬고 콧소리를 한껏 내며 무척이나 자상하게 세상사물과 소통하는 말투로 ‘어머~이게 모야~ 꽃이 활짝폈네~ 꽃이 우리 동우 온거보고 웃나봐앙~ 꽃이 인사하네~ 우리 동우도 인사할까~’ 모.. 이런 식이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무척 낯간지럽고 ‘왜저래?’ 라고 생각하지만 엄마들 나름대로는 마치 엄마의 사명인것처럼 누구나 하는.. 만국 엄마들의 공통어라고나 할까~
그러나 무심한 아들내미는 귀기울이지도 않고 나뭇가지 잡으랴, 꽃만지랴.. 날아다니는 곤충보랴.. 그저 신났다. 유모차도 안타고 팔에만 줄곧 매달려 자기하고픈 대로 몸을 놀린다. 아이가 금방이라도 내 팔에서 미끄러져 땅으로 곤두박질 칠까봐 온 신경을 아들에게 집중하고있을 때 ‘우와~’ 란 외침이 들렸다. 남녀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며 연꽃 구경이 한창인 듯 했다. 연애할 때조차도 ‘꽃 사올 돈이면 나 먹을거 사줘’ 라고 외쳤던 멋없는 내 눈에는 꽃보다 학생들이 더 신기해보였다. 난 그제서야 연꽃을 진지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내가 생각했던 연꽃은 그리 이쁜 꽃이 아니었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꽃도 아니어서 향기도 맡아본 적 없었고, 실제로 한번도 본적이 없는 꽃이었다. 그저 절에 가끔 가면 법당 한쪽 벽에 그려진 그리고 ‘심청전’ 같은 고전소설 속 삽화에 등장하는 ‘연분홍색 꽃’ 일 뿐이었다.